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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177
한자 辛未洋擾
영어의미역 American Disturbance of 1871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성주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외세침략사건
발생(시작)연도/일시 1871년 4월 3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871년 5월 15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평양
관련인물/단체 어재연|이창희

[정의]

조선 후기 미국 함대가 통상조약 체결을 강요하면서 조선에 침범함으로써 경기도 부천 지역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

[개설]

병인양요 등으로 서양과의 접촉이 잦아지자 대원군은 일선 방어를 위해 부천·강화·인천·김포·통진·남양 등 연해 지역에 요새를 세우고 정예 포수를 모집해 주둔하게 하였다.

[역사적 배경]

조선과 미국은 1855년(철종 6), 1865년(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 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다.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경 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조선인이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나라 정부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의했다.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야에 있었으므로 이를 거절했다.

1867년 미국은 슈펠트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해 손해보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며 지방관과 회담하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871년 조선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 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上海]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경과]

미국 함대는 1871년 4월 3일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4월 8일에는 물류도(勿溜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이창회(李昌會)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營)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같은 해 4월 14일 조선 정부에서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로는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고관(高官)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1871년 4월 15일 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鄭岐源)을 시켜 미국의 불법침략을 문책하고 통상조약교섭을 거절하게 했다. 로는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다.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 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하여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 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조선의 이러한 반응은 패전한 조선 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했던 미국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 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5월 15일 미국은 조선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결과]

신미양요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방** 신미양요 자료가 너무 없었는데 감사합니다.
한국사 수행평가로 필요한데 사용해도될까요?
  • 답변
  • 디지털부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용 부탁드리며, 인용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4.10.12
정** 이것을 좀 참고하여도 됩니까? 부탁드립니다 2011.10.31
신** 정말 자세히 나와있네요. 저 이것좀 써도 될까요? 2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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