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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197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임학성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기도 부천시 역사.

[개설]

부천은 일제강점기에 부평과 인천 지역의 일부를 병합하여 만든 고을이다. 따라서 부천의 조선시대사는 곧 부평사이다. 현재의 부천 지역은 조선시대 부평 영역의 동쪽과 남쪽 지역이었다. 주화곶(注火串)·상오정(上梧亭)·하오정(下梧亭)·석천(石川)·옥산(玉山) 등 5개 면이 이에 해당된다.

[연혁]

1413년(태종 13) 전국의 군현(郡縣)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부평은 도호부(都護府)로 편성되었다. 1438년(세종 20) 부평의 관민이 온천의 소재지를 숨기고 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446년(세종 28)에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연산군의 방탕함을 간했다가 참형에 처해진 내시 김순손(金舜孫)의 고향이 부평이라는 이유로 고을이 혁파되었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1년만에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698년(숙종 24)에는 원종으로 추숭된 인조의 부친 무덤인 장릉(章陵)에 방화한 최필성(崔弼成)이 이 고을 출신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되었으나, 10년 후인 1707년(숙종 33)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101호에 따라 전국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부·목·군·현을 336개 군으로 통폐합하였다. 이에 부평군인천부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6년 8월 4일 부제를 폐지하고 다시 도제를 실시하면서 부평경기도 부평군이 되었다.

[인구와 성씨]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조선시대 부평의 인구수는 15세기 전반에 954명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구수(口數)는 여자를 제외한 남자만의 수치로 이해되기 때문에 당시 부평의 인구수는 누락된 여자 인구를 포함하면 대략 1,9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후 부평의 인구수는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편찬한 1759년에는 10,898명으로 5배 가량 증가되었으며, 『호구총수(戶口總數)』를 편찬한 1789년에는 11,589명으로 증가하였다.

조선시대 부평의 인구수 중 현재의 부천 지역에 해당하는 5개 면의 인구수는 『여지도서』를 편찬한 1759년에 3,128명, 『호구총수』를 편찬한 1789년에는 3,501명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부평 지역의 인구 중 약 1/3이 현재의 부천 지역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평을 본관으로 하거나 이곳에 토착한 유력 성씨 집단으로 7성의 토성(土姓)이 있다. 김(金)·이(李)·유(柳)·형(邢)·손(孫)·최(崔)·진(陳) 등이 그것이다. 또한 외지에서 들어와 정착한 유력 성씨 집단으로 여겨지는 내성(來姓)은 조(趙)·유(柳)·윤(尹)의 3성이 있다.

[경제와 산업]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부평의 땅의 비척도는 절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부평의 간전(墾田)은 5,296결이며, 논과 밭이 서로 절반이라고 하였다. 부평에서 생산된 주요 농산물은 오곡과 조·팥·녹두·뽕나무·삼 등이었으며, 약재로는 사자발쑥과 삿갓나물 2종이 산출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부평의 토산물로 소금과 조기·굴·낙지·방게·새우·맛조개 등을 비롯한 12종이 기재되어 있다.

조선 후기 부평 지역의 농지 규모는 『여지도서』에서 볼 수 있다. 한전(旱田: 밭)이 1,557결 64부 3속이었으며, 수전(水田: 논)이 1,472결 25부 6속이었다.

[문과 급제자]

조선시대 부평 지역의 문과 급제자수는 총 81명이 확인된다.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소과(小科) 급제자가 68명이며, 대과(大科) 급제자가 13명이다. 소과 급제자를 성관(姓貫) 별로 보면, 전주이씨(全州李氏)가 12명으로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는 진주유씨(晉州柳氏) 10명, 해주정씨(海州鄭氏) 6명, 의령남씨(宜寧南氏) 5명, 청주한씨(淸州韓氏) 4명, 원주원씨(原州元氏) 3명, 여흥민씨(驪興閔氏) 2명, 밀양박씨(密陽朴氏) 2명, 밀양변씨(密陽卞氏) 2명으로 나타난다. 이 밖에 진주강씨(晉州姜氏)를 비롯한 15개 성관이 각 1명씩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대과 급제자의 성관은 진주유씨가 4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풍천임씨(豊川任氏) 각 2명, 고령박씨(高靈朴氏)·여흥민씨·대구서씨(大邱徐氏)·전주이씨·경주이씨(慶州李氏) 등이 각 1명으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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