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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237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Fighter
이칭/별칭 항일운동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추교찬

[정의]

일제강점기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한 부천 지역의 인물.

[개설]

조선 말기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이 본격화되며 국권 상실이 가시화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투쟁이 각 독립운동가들이 가진 사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경기도 부천 지역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항일의병운동]

일제는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5년의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한반도를 강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련의 조치를 단행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했던 1904년에는 한일의정서를 통해 행정권을 장악하였고 이듬해인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박탈하였으며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1907년 6월에는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마지막 보루였던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으로 시작된 항일 의병 운동은 한동안 침체되어 있었으나 이들 해산 군인의 참여로 일정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되면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의병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벌인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인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게 되자 이들은 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독립군으로서 일제에 대한 무력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 시기 부천 출신의 대표적인 항일 의병 운동가로는 경기도 부천시 원종동에서 태어난 남광원을 들 수 있다. 남광원은 1902년 10월 대한제국의 빈민 구제 의료 기관인 광제원 사무위원으로 출사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사직하고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으로 내려가 의병 운동을 벌였다. 1907년 군산에서 일본군 기병 2명을 사살하였으며, 1908년에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일본인 경영 상점에 들어가 의병 자금을 요구하여 불응하자 살해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김홍일(金洪一)·유장렬(柳章烈)·고문경(高文敬)·안승팔(安承八)·권두식(權斗植)·최옥일(崔玉一) 등을 규합하여 호남 일대에서 거병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10년 유장렬과 전라북도 고창군·부안군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약하던 중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3·1운동]

한민족의 대규모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이를 억누르기 위해 가장 잔학하고 폭력적인 식민 통치 방식을 채택하였다. 소위 무단 통치를 통해 한편으로는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헌병과 경찰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행정·경제·사회·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 걸친 식민 통치 기반을 마련하고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 방식에 대해 한민족은 3·1운동이라는 전 민족적 거사로 저항하였고 부천 지역 주민들 역시 격렬한 항일 시위를 일으키며 이러한 흐름에 적극 동참하였다.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 황어장[현 인천광역시 계양구 장기동]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부천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시위였다. 장날 장터에 모여든 수백여 명의 군중들은 당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현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에 거주하던 심혁성(沈爀誠)이라는 청년의 선창에 따라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심혁성은 당시 장터에 파견 나와 있던 순사에게 체포되어 주재소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임성춘(林聖春)이 시위대에 앞장서서 심혁성을 구출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은선(李殷先)이라는 인물이 순사의 칼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에 이은선의 친척인 이담(李墰)전원순(全元順)·최성옥(崔成玉) 등과 함께 통문을 돌려 사람들을 재집결시키고 일본인과 내통한 것으로 의심되는 면서기 이경응의 집과 장기리에 있던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사태가 확산되자 인천경찰서의 지원부대가 파견되었고 3월 25일 시위가담자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당시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현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에서는 조명원(趙明元)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시위가 있었다. 조명원은 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奉學)·문무현(文武鉉)·이난의(李蘭儀) 등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이란 단체를 조직하고 1919년 3월 28일 용유면민들과 함께 관청리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같은 섬 지역인 당시 경기도 부천군 덕적면[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덕적면 사립 명덕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임용우(林容雨)는 1919년 4월 9일 운동회를 이용해 서당교사 이재관, 합일사숙(合一私塾) 교사 차경창 등과 함께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외에도 1919년 3월 23일에는 당시 경기도 부천군 문학면 관교리[현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에서, 3월 26일에는 동양리(東陽里)에서도 각각 시위가 있었다. 3월 31일에는 대부면 동리에서도 김윤규(金允圭)·노병상(盧秉相)·홍원표(洪元杓)·권도일(權道一)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시위가 있었다.

한편 4월 1일 사천시장[현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에서는 당시 부천군 남동면 서창리[현 인천광역시 남동구 서창동]에 살던 송성용(宋聖用)이 오창조(吳昌祖)·김춘근(金春根)·윤영택(尹永澤)·박중일(朴重一)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이려다가 사전에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농민운동]

살인적인 일제 통치의 가장 큰 희생자는 식민지 조선의 농민과 노동자였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본국의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곡수탈정책을 실시하였다. 1910년대에는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많은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분리됨과 더불어 소작농이 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소작농의 숫자는 더욱 늘어만 갔다.

1920년대 농촌 인구 중 빈농이 전체의 75%(중농 18.5%, 부농 3.5%, 지주 3%) 정도를 차지하였으며 모두 고율의 소작료로 인해 경제적 파탄을 가져왔다. 따라서 농민들은 생존권 보장을 위한 농민 운동과 소작 쟁의를 치열하게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일제는 식민지 통치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1933년 전국적인 범위에 걸친 농촌진흥회의 조직을 통해 농민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이미 합법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진 독립운동가들은 이와 같은 농민이나 노동자 단체 등 일반 기층 대중 조직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투쟁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경기도 부천 지역에서 농민 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와 인물로는 경기도 부천군 남동면 발산리[현 인천광역시 남동구 수산동] 농촌진흥회와 심만택(沈萬澤)·최춘문(崔春文)을 들 수 있다. 심만택은 1927년 인천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로 1931년 7월에는 국제적색노동조합(國際赤色勞動組合) 사건으로 검거된 바 있으며, 1935년 발산리 농촌진흥회 야학교사인 최춘문과 함께 농민운동을 벌이다 1936년에 체포되었다.

[일장기 말소사건]

1936년 8월 동아일보사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시상식 사진을 게재하여 신문을 배포한 바 있다. 이를 주도한 이는 당시 경기도 부천군 부내면 산곡리에서 성장한 이길용(李吉用) 기자였다.

이길용은 3·1운동과 관련해서도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이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체육 기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1932년 8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권태하(權泰夏) 선수의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말소하기도 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 준 일장기 말소사건은 항일 언론 투쟁사의 최대 사건으로 손꼽힌다.

[해외 독립운동]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경기도 부천 지역의 인물로는 나성호(羅聖鎬)를 들 수 있다. 현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서 출생한 나성호는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15년 무렵 연해주로 이주하여 니코리스크에서 의원을 개설함과 더불어 『해조신문(海潮新聞)』에서 활약한 김이직(金利稷) 등과 협력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0년 이른바 4월 참변의 여파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지만 곧 석방된 후, 1922년경에는 중국 하얼빈에서 고려의원을 개설·운영하면서 고려공산당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928년 무렵에는 흑룡강성(黑龍江省) 앙앙계(昻昻溪)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 외 당시 부천군 소래면 대야리[현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출신의 김용산(金用山)과 현 부천시 심곡동 출신의 좌등용(佐藤勇)도 일본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아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동안 많은 부천인들이 민족 해방 운동에 참여하여 고귀한 삶을 희생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 따라서 이들을 찾아내고 그 행적을 기록하는 일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다.

[참고문헌]
  • 『부천시사』 (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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