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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739
한자 衣生活
영어의미역 Costum Lif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경애

[정의]

경기도 부천 지역 사람들이 착용해온 의복이나 이와 관련된 생활 풍속.

[개설]

부천 지역의 의생활을 살펴보기 위해서 400년 이상 부천시에서 살아온 여흥민씨 종손 민경흥 부부의 구술과 부천시 내동에서 태어나 작동으로 시집와 92세 된 이영순의 이야기를 토대로 부천 지역민들의 의생활을 상류층과 서민층으로 나누었다.

[상류층 의복]

1. 외출복

의금부 도사를 지낸 민경흥의 증조부는 70세가 될 때까지 점심도 먹지 않을 만큼 검소하여 가산을 일으켰다. 그 덕에 민경흥은 부천에서는 보기 드문 ‘ㅁ’자형 골기와집에서 나고 자랐다. 부천에 2개 밖에 없던 소학교 중에서 일본인이 주로 다녔던 ‘소사남심상소학교’에 다녔는데, 특별히 교복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방모직물로 만든 세루양복과 검정양말,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1930~40년대만 해도 남자들은 외출복으로 양복을 입는 사람이 많아지던 시기였지만, 부천은 시골이어서 일부 상류층만 양복을 입을 정도로 양복을 착용한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지체를 중요시 여기던 민경흥의 조부는 여자가 밖으로 다니는 것도 경계해, 민경흥의 어머니는 여름에도 반팔옷을 입지 못했다. 따라서 민경흥의 어머니는 의사 오빠가 사다준 반팔 원피스를 어른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난 한밤중에나 입고 집안을 돌아다녔을 뿐이라고 한다.

2. 결혼예복 및 혼수

민경흥의 아내 정해춘은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편이었으나, 엄격한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규수수업을 착실히 하여 시집올 때 혼수를 모두 직접 만들어왔다. 혼수는 버선 100켤레, 치마저고리 10죽(한 죽이 10벌), 베개·자부동(방석) 10개, 퇴침 10개 등이었다. 이불은 앙금이라 하여 청색과 홍색으로 요와 같이 2채를 해왔다.

덮는 이불은 얇은 이불과 차렵이불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으나, 요는 2개 이상 하면 쌍사람이라 하여 더 하지 못했다. 다른 것도 다 짝을 지어 해가는 것이라 하여 홀수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경흥과 정해춘은 서울 종로에 있는 동원예식장에서 1958년에 신식결혼을 했는데, 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한복에 면사포를 썼다.

3. 의복 장만

정해춘은 시집온 후에도 옷은 직접 다 만들어 입었는데 깨끼저고리까지 다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민경흥이 군인이어서 다른 지방으로 다니면서도 시어머니 생신이나 시아버지 생신, 김장 때면 며칠을 방에 들어앉아서 화로에 인두를 꽂아놓고 풀을 쑤어 명주 바지저고리를 꿰매었다. 집안에는 시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온 싱가미싱이 아직도 잘 보관되어 내려오고 있다.

[서민층 의복]

올해 92세가 된 이영순은 어려운 살림 때문에 옷은 언제나 만들어 입었다고 했다. 식구들의 옷 모두 감을 떠다 직접 염색약을 사서 집에서 물을 들여서 입혔는데, 분홍색과 검정색 물감을 사다 들였다. 상의는 저고리·적삼·조끼 등을 입었고, 하의로는 바지·잠방이, 속옷으로는 고쟁이·속곳을 입었다. 겉옷으로는 두루마기를 입었고, 머리에는 갓 대신 모자를 많이 쓰게 되었다. 버선과 양말은 공존하였는데 짚신과 미투리는 고무신으로 바뀌었다.

민경흥의 구술에서도 학창시절 그의 친구들은 무명한복에 고무신이 일반적인 차림이었다고 전한다. 겨울이라고 해도 외투가 따로 있지 않고 솜을 넣은 바지·저고리에 버선이 전부였다. 다른 지역에서 양복을 입던 1930~1940년대에도 성인 남자 가운데에서도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복을 많이 입었다고 한다.

[민속의례에 등장하는 의복]

부천의 역사와 민속의례 속에서 나오는 특이한 옷이 있다. 장말도당굿은 덕수장씨의 집성지인 장말에서 오래도록 내려온 마을 공동체적 축제로 승화된 굿의식이다. 덕수장씨들은 평택에서 임진왜란을 전후로 이곳으로 이주해와 농경을 주업으로 생활하였다. 이들은 음력 10월 10일을 맞아 추수에 대한 감사의식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서 조상을 섬기고 조상의 음덕(蔭德)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는데, 이것이 장말도당굿이다.

장말도당굿은 열두 거리로 진행된다. 그중에 셋째거리인 도당신을 모시는 과정에서 덕수장씨 문중의 도당할아버지로 점지된 사람이 도당신을 모셔오는 굿을 벌일 때 입는 도당할아버지옷이 특이하다. 대대로 내려오는 명주 깨끼두루마기인 신복은 누더기처럼 해지고 닳았으며, 손에 든 부채도 너덜너덜한 옛것 그대로이지만, 절대로 새로 장만하지 않는다고 한다. 낡은 도당할아버지옷을 입어야만 도당할아버지 신을 모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인석에 나타난 의복]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한언의 묘 앞에는 문인석이 있다. 한언은 예문관직제학과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는데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한언의 문인석은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문인석보다 작은 편이며 손을 모아서 소매에 넣고 공수하는 자세이다. 흔히 관복을 입고 홀을 들고 시립해 있는 조선시대 모습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 문인상의 복장이 당시 명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하나, 명나라의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형태의 관모를 쓰고 소매의 폭이 좁은 중국 변방 계통에서 유래한 복장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다.

[참고문헌]
  • 석주선, 『우리 옷 나라』(현암사, 1998)
  • 『부천시사』 (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
  • 인터뷰(작동 주민 민경흥, 남, 78세, 2008. 2. 15)
  • 인터뷰(작동 주민 정해춘, 여, 78세, 2008. 2. 15)
  • 인터뷰(작동 주민 이영순, 여, 92세, 2008.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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