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941
영어공식명칭 Saraeul|Saraeul Village
이칭/별칭 사래리,새롤,사라일(士羅日),사하리(沙下里),사리월(士里月),사래리(士來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사래울 -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
성격 마을

[정의]

경기도 부천시 역곡동에 있는 마을.

[개설]

역곡2동 삼신아파트 단지가 사래울이다. 남쪽으로는 부천동초등학교,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이 자리 잡았고, 북쪽으로는 감배산이 있었는데 지금은 빌라 단지가 들어서 있다.

[명칭 유래]

사래울은 ‘새를’이라고도 부르고, ‘사하리(沙下里)’, ‘사리월(士里月)’, ‘사래리(士來里)’라고도 부른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사래리(士來里)에 대해 “행정구역 벌응절리의 일부 부락으로서 옛날 이 마을에 유명한 선생이 글을 가르치고 있어 가끔 여러 곳의 선비들과 제자들의 내왕이 자주 있어서 사래리로 불리우고 있음”이라고 하였다. 최현수의 『부천사연구』1[1992]에는 사래리에 대하여 “이곳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 휘하에 있던 박철정(朴鐵貞)이 광주군 번송에서 이곳에 와 ‘선비가 왔다’ 해서 사래리라 불렀다 한다. 1920년대에 나온 지도에는 사리월(士里月)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새를’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사래리 뒷산에서는 사래리 애향회 주관으로 매년 음력 시월 춘덕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 산을 새를산[새럴산]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한도훈은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2001]에서 “새를은 사래울을 줄여서 발음하다 생긴 현상”이라고 하였다. 한도훈은 “또한 사래울에서 사래라는 말을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중략] 사래를 길게 늘어진 산등성이 아래 밭골인 이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략] 하지만 사래울은 쇳골을 의미한다. 사래울에서 울은 마을을 가리키고 사래는 쇠의 고어이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사래울은 금을 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부천사연구』1, 『부천문화의 재발견』[1996], 『부천시사』[2002] 등에서는 죽산박씨 박철정[그의 아들이 박진]이라는 선비가 정착을 했다 하여 사래리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다. 양경직은 『다시 쓰는 부천의 향토지명』[2016]에서 “‘사래울’은 밭이랑처럼 좁고 긴 장구평(長久坪)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1912년도 벌응절리 지적도를 보면 마을의 지형이 좁고 긴 밭이랑[장전]처럼 길다란 장구평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사래울이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정렬모 등이 펴낸 『조선어 고어해석』[1991]에서는 사래를 ‘묘직이나 마름이 도지 없이 붙여 먹는 논밭’으로 풀이하고, 사래논이나 사래밭이라고 하였다. 즉 1년 품삯인 새경[私耕]을 의미하므로 묘지기나 마름 등의 신분이 낮은 하층민들이 많이 모여 살던 동네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여월동여월중학교 뒤편 자연 마을을 ‘새경골’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 부평군 하오정면 여월리 산곡명 조에는 효경곡(孝經谷)[효경골]으로 조사되어 있다. 지방에 따라 ‘ㅎ’을 ‘ㅅ’으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지만, 머슴들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부모를 위해 논을 사 드려 효도하는 경우를 교훈적으로 표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효경곡은 사래울의 사래를 사래밭으로 해석할 수 있는 주요한 증거로 보는 견해이기도 하다.

[형성 및 변천]

사래리는 조선시대에 죽산박씨 가문이 입향하면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이전부터 형성된 마을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있어 적어도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조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자연환경]

사래리 주변에는 원미골, 새럴산, 백토현산이 있고,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옆에 멱골과 새장터, 그리고 작밭골이 있다.

[현황]

사래울멱골 어귀 오른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역곡2동 삼신아파트가 들어섰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1.02 사래울 <참고문헌> <문헌><서명 검색어='삼국사기'>『삼국사기(三國史記)』</서명></문헌> <문헌><저자>김기빈</저자>, <서명 검색어='한국의 지명 유래'>『한국의 지명유래』</서명>1~4(<출판사항>지식산업사, 1990~1997</출판사항>)</문헌> <문헌><서명 검색어='부천사 연구'>『부천사 연구』</서명>(<출판사항>부천역사연구소, 1992</출판사항>)</문헌> <문헌><저자>이민우</저자>, <서명 검색어='한국지명사전'>『한국지명사전 1993-1994』</서명>(<출판사항>한국교열기자회, 1993</출판사항>)</문헌> <문헌><서명 검색어='부천시사'>『부천시사』</서명>(<출판사항>부천시사편찬위원회, 2002</출판사항>)</문헌> <문헌>한도훈,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부천문화원, 2001)</문헌>
2010.12.16 사래울 1) <소표제>[명칭유래]</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지명 검색='0' 검색어=''>새를</지명>’이라고도 부르고, ‘<지명 검색='0' 검색어=''>사하리(沙下里)</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사리월(士里月)</지명>’이라고도 부른다. <서명 검색='0' 검색어=''>『조선지지자료』</서명>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서명 검색='0' 검색어=''>『부천시사』</서명>나 <서명 검색='0' 검색어=''>『부천사연구』</서명> 등에서는 <인명 검색='1' 검색어='죽산박씨'>죽산박씨</인명> <인명 검색='1' 검색어='박철정'>박철정</인명>이라는 선비가 와서 정착을 했다고 해서 <지명 검색='0' 검색어=''>사래리(士來里)</지명>라고 부른다고 했다. 또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에서 ‘사래’라는 말을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라는 조선시대 시조에서 보이듯 사래를 길게 늘어진 산등성이 아래 밭골인 이랑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표현은 마을을 가리킬 때는 쓰이지 않고 주로 들을 가리킬 때 쓰였다.</문단>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쇠나 금이 나는 마을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에서 울은 마을을 가리키고 사래는 쇠의 고어이다. <서명 검색='0' 검색어=''>『삼국사기』</서명>지리지에는 철이나 금이 난 곳을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로 표기를 하고 있다. 사래에서 ‘ㄹ’이 탈락하여 후대에 쇠가 되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뱀골'>뱀골</지명>에 금광이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금을 캤고, 광복 후에는 <인명 검색='0' 검색어=''>윤경문</인명>이라는 사람이 금을 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금을 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문단> -->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지명 검색='0' 검색어=''>새를</지명>’이라고도 부르고, ‘<지명 검색='0' 검색어=''>사하리(沙下里)</지명>’·‘<지명 검색='0' 검색어=''>사리월(士里月)</지명>’이라고도 부른다. <서명 검색='0' 검색어=''>『조선지지자료』</서명>에는 표기가 되어 있지 않다. <서명 검색='0' 검색어=''>『부천시사』</서명>나 <서명 검색='0' 검색어=''>『부천사연구』</서명> 등에서는 <인명 검색='1' 검색어='죽산박씨'>죽산박씨</인명> <인명 검색='1' 검색어='박철정'>박철정</인명>이라는 선비가 와서 정착을 했다고 해서 <지명 검색='0' 검색어=''>사래리(士來里)</지명>라고 부른다고 했다. 또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에서 ‘사래’라는 말을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라는 조선시대 시조에서 보이듯 사래를 길게 늘어진 산등성이 아래 밭골인 이랑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표현은 마을을 가리킬 때는 쓰이지 않고 주로 들을 가리킬 때 쓰였다.</문단>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쇠나 금이 나는 마을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에서 울은 마을을 가리키고 사래는 쇠의 고어이다. <서명 검색='0' 검색어=''>『삼국사기』</서명>지리지에는 철이나 금이 난 곳을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로 표기를 하고 있다. 사래에서 ‘ㄹ’이 탈락하여 후대에 쇠가 되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뱀골'>뱀골</지명>에 금광이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금을 캤고, 광복 후에는 <인명 검색='0' 검색어=''>윤경문</인명>이라는 사람이 금을 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금을 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하낮로 사하리(沙下里)라고 하는 것은 모래 사(沙)자가 금이나 쇠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금이나 쇠가 나는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대부터 금이나 쇠가 나오는 곳을 신성시 여기는 풍습으로 인해 붙여진 것이다.</문단> 2) <소표제>[현황]</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지명 검색='0' 검색어=''>소새</지명>에서 <지명 검색='0' 검색어=''>삼거리 새장터</지명>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어지면 만나는 첫 마을이고, <지명 검색='0' 검색어=''>삼신아파트</지명>단지가 있는 바로 아래쪽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에서 서쪽으로는 <기관 검색='1' 검색어='부천동초등학교'>부천동초등학교</기관>와 <기관 검색='1' 검색어='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기관>이 있고, 북쪽으로는 <지명 검색='1' 검색어='감배산'>감배산</지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빌라단지가 들어서 있다.</문단> -->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은 <지명 검색='0' 검색어=''>소새</지명>에서 <지명 검색='0' 검색어=''>삼거리 새장터</지명>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어지면 만나는 첫 마을이고, <지명 검색='0' 검색어=''>삼신아파트</지명>단지가 있는 바로 아래쪽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울'>사래울</지명>에서 서쪽으로는 <기관 검색='1' 검색어='부천동초등학교'>부천동초등학교</기관>와 <기관 검색='1' 검색어='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기관>이 있고, 북쪽으로는 <지명 검색='1' 검색어='감배산'>감배산</지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빌라단지, 꽃동네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아파트단지가가 들어서 있다.</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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