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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1095
한자 尹桓
영어음역 Yun Hwan
이칭/별칭 충효(忠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강옥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미상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386년연표보기
본관 칠원
대표관직 문하시중

[정의]

고려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칠원(漆原). 군부판서(軍簿判書) 윤수(尹秀)의 손자이다. 아들은 없고, 서녀를 남좌시(南左時)에게 출가시켰다.

[활동사항]

윤관충숙왕 때에 호군(護軍)을 지내고 충혜왕이 즉위한 후 대언(代言)으로 임명되었는데, 1328년(충숙왕 15) 호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모시와 종이를 바쳤다. 충혜왕 초에는 대언을 제수받았으나, 충숙왕이 복위하자 전왕의 폐행(嬖幸)으로 몰려 손기(孫琦)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가 장류(杖流)되자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익청(曹益淸)충혜왕 측근의 불량배들을 제거하려다 참소를 입어 칠원군으로 추방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동지밀직(同知密直)이 되고, 원나라로부터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郞)의 관직을 받았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曹頔)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輸誠亮節輔理功臣)호를 받고 찬성사로 승진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 다시 행성낭중(行省郞中)을 제수받았다. 1343년 강릉교주도도순문사(江陵交州道都巡問使)로 임명되었으며, 1349년(충정왕 1)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수성양절선력보리공신(輸誠亮節宣力保理功臣)호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찬성사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56년 수충협의동덕익찬공신(輸忠恊義同德翊贊功臣)호를 받았다. 곧 좌정승으로 승진, 그해 관제개혁으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죄를 입어 유배되었다. 1360년 칠원후(漆原侯)로 봉해졌다가 칠원백(漆原伯)으로 개봉(改封)되고, 1365년 동서북면도통사(東西北面都統使)가 되었다.

1371년 신돈(辛旽)이 제거된 뒤 문하시중이 되었고, 무인으로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임하고 추성병의동덕섭리익찬공신(推誠秉義同德燮理翊贊功臣)호를 받았으나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1377년(우왕 3) 북원(北元)으로부터 평장사(平章事)를 제수받고, 1380년 다시 문하시중에 올랐다. 다섯 왕을 섬기며 세 번 수상을 지냈고, 거부로서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 기근을 당하자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윤환은 보법사라는 절을 중수하고 절의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대기 위하여 자신의 재산을 시납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바친 재산 가운데는 지금의 부천 지역에 속하는 부평부와 김포현·수안현·동성현에 조상 때부터 갖고 있던 토지와 부인 편에 상속받아 김포현·동성현에 갖고 있던 토지가 있었다. 부평부 등지에 있던 토지는 그가 개경에서 생활하는 데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절에 시납한 것말고도 개경 주위에 더 많은 농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본관인 칠원현(漆原縣)에도 토지가 있어 퇴임한 뒤에는 그곳으로 낙향하였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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