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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1204
한자 金睟
영어음역 Gim Su
이칭/별칭 자앙(子昻),몽촌(夢村),석릉(石陵),소의(昭懿)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부천시
성별
생년 1547년연표보기
몰년 1615년연표보기
본관 안동
대표관직 영중추부사

[정의]

조선 중기 부천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석릉(石陵).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낸 김홍도(金弘度),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며, 형은 김첨(金瞻)이다. 조부는 김노(金魯), 증조부는 김희수(金希壽)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이고, 장인은 성호문(成好問)이다.

[활동사항]

김수는 1573년(선조 6)인 27세 때 알성시 병과에 1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교리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개수하였다. 1583년 변방의 오랑캐가 침입하여 경원부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서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종사관이 되었다. 1584년(선조 17)에는 순무어사(巡撫御使)를 지냈다. 당시에 유학(幼學) 신급(申岌)이 올린 상소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1587년(선조 20)에 평안감사, 1590년(선조 23)에는 부제학에 특별히 제수되기도 하였다.

1591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에 대해 옥당에서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려고 할 때, 부제학으로서 사성 우성전(禹性傳)의 집으로 의논하러 가서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다. 대사간 홍여순(洪汝諄)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리되자 남인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로서 진주에 있다가 동래가 함락되자 밀양과 가야를 거쳐 거창으로 도망을 가는 등 방어에 힘쓰지 않았다.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尹國馨)이 근왕병을 일으키자, 비로소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근왕병이 용인(龍仁)에서 패하자 경상우도로 돌아가던 중 영남초유사(嶺南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郭再祐)와 불화가 심하여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는 하였지만, 처사가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란의 초기에 계책을 세워 왜적과 대처하지 못하고 적병을 피하여 전라도로 도망갔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1592년(선조 25)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경상도관찰사·지중추부사·승문원제조와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선조 29)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군(明軍)의 군량을 충당하기 위하여 군량 징수에 힘썼다. 1604년(선조 37) 경기감사 때 방납(防納)의 폐단을 고칠 것을 건의하였고, 사헌부지평과 판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606년(선조 40)에는 호조판서와 오위도총부총관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대에도 호조판서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나, 1613년(광해군 5) 손자인 김비(金秘)가 무고로 옥사할 때 탄핵을 받고 삭직당하였다.

일찍이 호조판서로서 임진왜란 때 치적을 올려 수십 년 이래의 호조판서 중에서 으뜸으로 꼽혔다. 말년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다. 1591년 홍여순이 간계를 꾸며 사류(士類)들을 몰아내려고 그를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죽음을 듣고 나라의 충신을 잃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인조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다.

[저술 및 작품]

선조의 명으로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개수하였고, 저서로는 『몽촌집(夢村集)』이 있다. 성균관대학교에 소장 중인 『근묵(槿墨)』에서 그의 필체를 찾아볼 수 있다.

[묘소]

김수의 묘는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 산59-1번지에 있다. 묘 주위가 고강아파트 및 신축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묘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상단에 김수의 묘로 추정되는 1기가 있고, 하단에는 4기의 묘가 있다.

상석과 향로석,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 등의 석물이 있다.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에는 그의 묘소가 부천 오정면 고강간좌(古康艮座)에 자리하고 있으며,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찬한 신도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이 신도비는 찾아볼 수 없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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