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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2007
한자 富川-姓氏
영어의미역 Native Clans in Bucheo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부천시
집필자 한도훈

[개설]

부천이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지어졌기 때문에 부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유일하게 부천임씨가 있을 뿐이다. 다만 현재 부천과 가까운 곳인 부평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 데 일등공신이 된 이희목부평이씨가 있고, 희귀성인 부평 사씨(舍氏)가 있다. 조선시대까지 부천이 부평으로 불렸기 때문에 부천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에 부평이씨부평 사씨(舍氏)를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또한 부천의 마을을 집성촌으로 해서 여러 대째 살아온 성씨들은 많이 있다. 이들은 부천이 도시화되기 이전부터 마을별로 모여 살았다. 밀양변씨는 조선시대 흑량리(黑梁里)로 불리던 강상골에서 살았고, 전주이씨내동에 자리를 잡았다. 내동에는 성주여씨도 함께 살았다. 여기에 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명회의 동생인 한명진 후손들인 청주한씨가 계수리·춘의동에 정착촌을 이루며 살았다. 죽산박씨는 현재 역곡2동 지역인 사래리에 정착했고, 밀양박씨삼정동인 시우물에 정착했다. 시우물이 포함된 약대에는 김해김씨도 함께 어울려 살았다.

장말도당굿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마을이 된 장말에는 덕수장씨가 평택에서 이주를 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연안차씨도 함께 살아 집성촌은 아니었다. 조선 성종의 다섯 번째 딸이었던 경숙옹주의 남편으로 유명한 민자방이 살던 곳은 까치울, 즉 작동이다. 까치울은 민씨의 집성촌으로 불릴 만하다. 안동장씨의 묘소가 작동에 있다.

이밖에도 원주원씨여월동에 정착해 살았고, 수성최씨여월동에 안착했다. 사래이로 불린 상동에는 희천김씨·덕수이씨·진주강씨·나주나씨 등 여러 성씨가 섞여 살았고, 멧마루 원종동에도 의령남씨·밀양손씨·안동김씨가 섞여 살았다. 고얀리로 불리던 괴안동에는 안동권씨·남원양씨가 살았고, 솔안말로 불리던 송내동에는 여주이씨·죽산박씨·평산신씨·이천서씨가 한데 어울려 살았다. 작은 마을이었던 대장동에는 반남박씨가 살았고, 도당동에는 은진송씨가 살았다. 인천이씨와 조상은 하나지만 본이 다르고 성이 다른 문화유씨여월동에 정착하였고, 현재도 그 후손들이 성곡동에 살고 있다.

[밀양변씨 집성촌 강상골]

고리울 강상골밀양변씨들의 집성촌이다. 변씨의 시조는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팔계(초계)군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변씨는 이후 초계변씨와 밀양변씨로 본관이 나뉘었다. 밀양변씨는 밀양에서 대대로 살아온 변고적을 1세 조상으로 한다. 변고적은 시조 변정실의 4세손이다. 변고적이 밀양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후손들이 초계변씨에서 밀양변씨로 본관을 변경한 것이다.

밀양변씨가 부천에 정착하게 된 과정은 태어난 연도가 불분명한 변예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변예생은 변고적의 13세손이다. 변예생은 당시 흑량리로 불리던 곳에 정착하면서 조선시대 종7품 벼슬인 우군사정으로 별장직을 맡았다. 이후 변종인·변삼근 같은 후손들이 같은 무인의 길을 걷게 된다. 사후에 변예생은 이조참판으로 추증이 되었다.

변종인(卞宗仁)변예생의 아들로 당시 부평 흑량리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열심히 무예를 닦아 1452년(문종 2) 5위의 하나인 충순위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그 다음 궁궐의 경비를 맡아보는 내금위에 속하게 되었다. 1460년(세조 6) 무과에 급제했고, 1467년(세조 13)에는 이시애 난이 발생해 이를 평정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워 당상관으로 승차하게 되었다.

이후 남해현령·만포첨사·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하고, 1473년(성종 4)에는 말갈족이 침입하자 이를 진압하는 조전장(助戰將)으로 참전해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전라도병마절도사·영안북도병마절도사·충청도수군절도사·영안남도 병마사·평안도병마절도사·경상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면서 무인으로 평생을 보냈다. 1498년(연산군 4) 고령임에도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그 해 지중추부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다음 해인 1499년 여름에 순변사로 함경남도에서 변방을 구축하다가 풍질이 생겨 1500년에 사망해 고향인 강상골 선산에 묻혔다. 신도비는 대제학 성현이 찬하고, 안침이 전(篆)하였으며, 부천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변종인의 큰아들인 변강지는 사마시에 급제하여 정6품 벼슬인 정언을 지냈다. 변강지의 아들인 변응몽은 합천군수를 지냈고,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변응몽의 아들들인 변희눌변희전은 각각 찰방과 주부를 역임했다. 변희전의 아들인 변건원은 선무랑을 지냈고,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변건원의 아들인 변삼근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냈다. 변혁조는 대과인 문과에 급제를 했지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변해준변정상이라는 양자를 들였는데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3변을 낳았다. 변영만은 한학자이자 법률가로 이름이 높았고, 변영태는 국무총리를 지내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까지 했다. 막내 변영로는 시인이자 영문학자, 민족문학가로 이름을 높게 빛냈다. 이처럼 밀양변씨변예생이 고강동 흑량리에 들어온 뒤 550여 년에 걸쳐 수많은 인물들이 명멸해 갔다.

[계수리에 정착한 청주한씨]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연원은 마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 말기 원왕의 셋째 아들로 신라 탈해왕 때 벼슬길에 올라 상당한씨라는 성씨를 습성하고, 청주를 본관으로 삼은 한우량을 시조로 한다. 그 뒤 한우량의 32세손인 한란으로 고려 태조 때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문하태위개국벽상공신의 지위까지 올랐다. 부천 계수리의 한씨는 청주를 본관으로 하고, 한란의 12세손인 문열공 한상질의 후손들이다. 문열공 한상질은 조선 건국 초에 명나라에 조문사로 가 국호를 받아왔으며 세조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의 조부이다.

한명회의 친동생이었던 한명진의 아들인 한언이 부천에 내려와 계수리에 정착했다. 한언한명회의 음덕을 입어 음보로 관직에 등용되어 관직 생활을 하던 중 1469년(예종 1)에 부사과로 있으면서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474년(성종 5)에는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사성에 발탁되었다. 이후 이조참의·공조참의를 거쳐 판결사·장흥부사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장예원판결사·사간·호조참의·동부승지겸경연차찬관을 지내고, 도승지겸예문관직제학·대사헌·상서정원·병조참지·예조참의·형조참판·이조참판을 지냈다. 1491년(성종 22)에는 사헌부대사헌·오우도총부부총관을 지냈고, 1492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북경 회동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한언의 장자인 한홍윤은 장악원첨정을 지냈다. 한홍윤의 아들 한용은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한언의 셋째 아들 한홍주는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우승지겸경연원참찬관에 추증되었다. 한홍주의 아들 한진은 적순부위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후 한진의 장자인 한수경은 돈녕부도정을 지냈고, 낭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한수경의 아들인 한준은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계수리에는 한언의 묘표와 한준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한준의 관직이 그 중 월등하였기 때문이다. 한언의 묘표는 부천시 향토유적 제2호이고, 한준의 신도비는 부천시 향토유적 제3호이다. 한준의 아들인 한여직은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한편, 계수리에 살던 한씨 중에서 한언의 넷째 아들인 한홍연계수동에서 분가하여 춘의동 양지마을에 이주하게 된다. 한홍연은 진사에 올라 어모장군으로 중부장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홍연의 장자인 한구는 강원도사와 의주목사를 역임하고, 사후에 승정원부정자에 추증되었다. 한구의 장자인 한수덕은 강원도사와 좌집의를 지냈다. 한구의 둘째 아들인 한수성은 호조정랑과 금구현감을 지냈다. 한수성의 둘째아들인 한탁은 장염현감을 지냈고, 한탁의 아들인 한성은 고부군수 등 한직을 돌았다.

[내동에 이주한 전주이씨]

이씨는 전주이씨·경주이씨·연안이씨·전의이씨·광주이씨·한산이씨·덕수이씨·용인이씨·여주이씨·성주이씨·벽진이씨·고성이씨·우봉이씨·진성이씨·함평이씨·영천이씨·평창이씨·합천이씨·인천이씨·청해이씨·공주이씨·부평이씨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전주이씨(全州李氏)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우리나라의 가장 유력한 성씨가 되었다. 전주이씨는 신라 문성왕 때에 경주의 도성을 고쳐 짓거나 쌓는 일을 맡아본 관청의 관원인 사공을 역임한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다.

1.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부천에 전주이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태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효령대군 이보(李𥙷)의 4세손인 칠산군 이선손의 여섯째 아들 이옥이 조선 중종부천 내동에 낙향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을 효령대군 사직공파 내동종중이라고 부른다. 내동부평도호부가 있던 계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번성했으며 밀양박씨 등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 살았다. 이들은 효령대군을 시조로 하여 효령대군파로 불린다. 전주이씨 중에서 가장 번창한 가문에 속한다. 이옥의 양자인 이동의 아들 이준언은 가정대부로 신령현감을 지냈다. 이준언의 아들인 이채는 선공감의 감역을 지냈다. 이채의 아들인 이진욱은 오위의 사과를 역임하였고,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이진욱의 아들 이상은 생원을 지냈으며 계양팔문장가의 한명으로 이름을 빛냈다.

2. 화의군파(和義君派)

전주이씨 중에서 세종의 아홉째 아들인 화의군 이영을 중시조로 하는 파이다. 이들 후손들이 부천에 정착한 것은 영조 때이다. 정헌대부 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총관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된 6세손 이한규의 묘소가 경기도 양주에서 여월동으로 이장되면서부터이다. 이한규의 다섯째 아들 이여명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 부호군을 지냈고, 여덟째 아들 이여신도 부호군을 지냈다.

이한규의 증손인 이문덕은 무과에 급제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이문덕의 장자인 이신경은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지냈고, 둘째 아들인 이심경은 군수를 역임하고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한규 묘역은 부천시 향토유적 제4호로 명명되어 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여월동이 아파트 개발되면서 여월동에 살던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3. 밀성군파(密城君派)

세종의 13남 밀성군 이첨을 중시조로 한다. 효령대군파에 못지않게 번성한 집안이다. 밀성군의 14세손인 이병덕이 괴안동에 정착하면서 부천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은 괴안동이 개발되면서 전통 마을이 해체되고 집안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4.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임영대군 이구세종의 넷째 아들이다. 임영대군 후손들이 부천에 정착한 것은 4세손인 이경이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신대리에 살다가, 1527년(중종 22) 종친부에 속한 정6품 부흥감이 되어 깊은구지로 불리던 부천시 심곡본1동에 낙향하면서이다. 이경의 넷째 아들인 이시의가 심곡에 정착했고, 다섯째 아들인 이시분은 부평 약대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6세손 이정흥은 부사직을 역임하였고, 이정익은 생원진사과에 급제하여 참의에 추증되었다. 이정익의 아들인 7세손 이필명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필명의 아들인 8세손 이관징은 가선대부로 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후손들은 심곡본1동이나 약대동이 개발되면서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

5.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 이초를 중시조로 한다. 명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선조이다. 덕흥대원군의 9세손 이명인이 조마루원미1동에 정착하면서 부천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100여 년 전 소사본1동에 낙향한 후손도 있는데 이들은 『서사록(西槎錄)』의 저자로 사헌부감찰을 지낸 이종응의 후손들이다.

[사래리인 역곡2동에 정착한 죽산박씨]

죽산박씨(竹山朴氏)의 시조는 충정공 박기오이다. 박기오는 신라 경명왕 넷째 아들인 박언립의 아들로 고려 태조 때 삼한벽상공신태보삼중대광에 이르렀고, 충정이라 시호되었다. 박기오의 12세손인 박철정이 부천 사래리로 옮겼다. 이후 후손들은 사래리·솔안말·범박동에 터를 잡았다.

박철정의 아들 박진은 사래리에 정착해 살았다. 박진의 아들인 박문필은 인제현감을 지냈고, 통정대부에 올랐다. 박문보의 장남인 박기남은 임진왜란 당시 영남에서 주로 왜적의 정세 탐문을 맡는 등 공을 세웠다. 중림찰방을 지냈다. 차남인 박영남은 장악원첨정을 지냈다. 이후 박영남의 아들인 박벌은 훈련원판관을 지냈다. 사래리 역시 도시 개발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벌응절리에 정착한 후손들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시우물에 정착한 밀양박씨]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전체 박씨의 80%에 달할 정도로 번성한 집안이다.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29세손인 신라 경명왕의 큰아들 밀성대군 박언침을 시조로 한다. 밀양박씨가 부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시조 규정공 박현의 15세손인 박선이 조선 숙종 때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에서 시우물로 이주 정착하면서부터이다. 박선은 1683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를 지냈으며 계양팔문장가에 속했다. 이후 현감·병조정랑·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도 인동의 도와서원에 배향되고 『도와문집』을 남겼다.

박선의 장자인 박규문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장연현감·세자시강원헌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시우물을 빗대 지은 『궁와집』이 전하며 계양삼호걸에 속했다. 현재 박규문의 후손인 박노송이 시우물 공장 지대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다른 후손들은 시우물 근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까치울, 작동에 정착한 여흥민씨]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시조는 고려 때 종8품인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낸 민칭도이다. 민씨는 본래 공자의 제자 십철 중 한 사람인 민자건의 후예로, 그 후손이 고려 때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여주의 옛 이름인 여흥에 정착하게 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민칭도의 16세손인 민종원 때 경기도 반월에서 까치울로 이주하면서부터 부천에 살게 되었다. 민종원은 영유현령을 지냈고,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민종원의 둘째 아들인 민자방성종의 다섯째 딸인 경숙옹주와 혼인하여 왕의 부마가 되었고, 봉헌대부에 봉해졌으며 여천위라는 작위를 받았다. 현재 까치울 능골에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민자방의 아들인 민희열은 단양군수를 지냈으며 사후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민희열의 아들인 민홍준은 광흥군수를 지냈고,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민희열의 아들이었던 민의준도 진사가 되었다. 민의준의 아들인 민수경은 정선군수를 지냈으며, 사후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

민수경의 아들인 민만도 진사가 되었는데 민만의 다섯째 아들인 민이승은 창릉참봉·영릉참봉·효릉참봉을 역임한 뒤 종부시주부로 승진되었지만 사양하고 더 이상 관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문집인 『성재집(誠齋集)』 7권이 전한다. 이후 29세손인 민정식이 금부도사를 지냈다. 현재는 까치울여흥민씨 후손인 민경흥이 종가를 지키고 있다. 부천에서 가장 오래된 옛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장말에 정착한 장말도당굿의 시조 덕수장씨와 연안차씨]

1. 덕수장씨

덕수장씨(德水張氏)의 시조는 아라비아인 회회국(回回國) 사람인 장순룡이다. 장순룡은 고려 원종충렬왕비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충렬왕으로부터 장순룡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장순룡은 원과의 외교에서 활약하였고 대장군까지 올랐다. 이 덕분에 덕성부원군에 봉해졌고, 경기도 개풍군 덕수현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본관을 덕수로 삼게 되었다. 덕수장씨가 부천 지역에 정착하게 된 것은 장순룡의 12세손인 장몽기가 경기도 평택에서 장말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장말도당굿의 유래를 보면 장말에는 돌팡구지라고 부르는 할아버지당(큰당, 웃당)과 할머니당(아랫당, 작은당)이 있다. 돌팡구지는 마을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로 4m, 세로 2.5m, 높이 1m 가량의 큰 바위이며, 할머니당은 예전에 마을 중앙에 높이 솟은 개죽나무와 당집으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 할아버지당으로 옮겨져 있다.

이 할머니당의 당집은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건물을 헐고 다시 지었다. 그때 허문자리에서 조그만 쇠말이 하나 나왔다고 하는데 그 말은 묘하게도 한쪽 다리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다리 하나 든 말과 관련하여 내려오는 전설로 임진왜란 때 이 마을에 용감한 장씨 장군이 있었는데 왜군이 놓은 덫에 치여 사람과 말의 다리가 부러져 잡혔다고 한다. 그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도당굿을 할 때 도당을 모시는 도당할아버지는 외다리춤을 춘다.

실제 2002년 보물 1334호로 지정된 『의병진군공책(義兵陣軍功冊)』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우배선이 자신의 휘하 의병부대 장병들의 신분과 전과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장몽기가 등장하는데, 우배선 휘하 88명 중 최고의 전과를 올린 이로 수군 병사지만 의병으로 합류했다고 되어 있고, 참살 5건, 사살 33건, 작살 13건으로 도합 51건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장몽기가 장말도당굿의 장군으로 기록되는 그이가 아닐지 추론해 본다. 사료적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현재 장말도당굿은 덕수장씨 후손인 장한복에게서 장현수로 옮겨졌다. 장현수는 장말에 살고 있다.

2. 연안차씨

연안차씨(延安車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우리나라 차씨는 사신갑(似辛甲)이 고조선으로 망명, 정착하여 왕조명(王祖明)이라 이름하였고 그 후손인 왕몽(王蒙)이 전씨(田氏), 신씨(申氏) 등을 거쳐 차씨로 성을 바꾸고 이름을 차무일(車無一)이라 하였는데, 그가 차씨의 시조이다.

차무일의 33세손 차승색(車承穡)은 애장왕(哀莊王)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헌덕왕(憲德王)의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황해도 구월산에 숨어 지내면서 조모의 성인 양씨(楊氏)의 뜻을 따서 성을 유씨(柳氏)로 바꾸었는데, 그의 6세손인 유차달(柳車達)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장남인 효전(孝全)은 차씨로 복성(復姓)되어 연안차씨의 시조가 되었고, 차남인 효금(孝金)은 유씨를 이어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시조가 되었다.

연안차씨는 18세 차포온의 아들 대에서 문학공파(文學公派)·전서공파(典書公派)·월파공파(月波公派)·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분파되었으며, 그 외에 송림백공파(松林伯公派)가 있다. 부천의 연안차씨는 차효전의 20세손인 문절공 차원부의 후손인 차윤보·차선우·차천흥 3형제가 장말에 이주하면서 살게 되었다.

[여월동 성곡에 정착한 문화유씨와 원주원씨]

1. 문화유씨

문화유씨(文化柳氏)는 고려 개국공신 유차달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유차달은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 유주(儒州)[문화의 삼국시대 지명]의 호족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을 치러 남으로 정벌할 때 군량 보급의 문제가 있었는데, 이때 유차달은 수레 1천 량(輛)을 제작하여 군량을 보급했다 한다. 그 공으로 대승(大勝)을 거두고 삼한공신에 봉해졌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족보에는 통합삼한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차달의 원래 이름은 해(海)였는데, 왕건이 ‘이차위달(以車爲達)’했다고 하여 차달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한다.

부천에 정착한 문화유씨는 대승공파로 대승공파 25세손인 유시방이 경기도 파주에서 여월동 성곡으로 이주해 오면서 부천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는 문화유씨 선산이 원미산 원골에 있고, 개발을 면한 성곡에서 문화유씨 후손인 유덕영이 살고 있다.

2. 원주원씨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시조는 당 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한 8학사 중 한 명인 원경(元鏡)인데, 중국 원성(原城)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원경(元慶)이다. 원경은 당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고구려에 와서 두 나라의 국교 회복과 보장왕(寶藏王)의 책봉에 힘썼으므로 보장왕이 그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하였다고 한다. 원주원씨는 원주를 단본으로 하며, 계보를 달리하는 운곡계(耘谷系)·원성백계(原城伯系)·시중공계(侍中公系)·충숙공계(忠肅公系)의 네 파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충숙공계와 원성백계는 합보되었다.

부천의 원주원씨는 시중공계로 21세손인 원계철 때부터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인천시 신천동을 대종중으로 하는 원주원씨 계철공파는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서 이주하여 여월동에 뿌리를 내리고 200여 년을 살고 있다. 원세항은 순조 때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고, 원석춘철종 때 진사에 올랐다. 부천시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으로 있는 원혜영도 이 원주이씨에 속한다.

[멧마루에 정착한 의령남씨·밀양손씨·안동김씨]

1. 의령남씨

의령남씨(宜寧南氏) 시조는 남민(南敏)으로, 본명은 김충(金忠)이다. 원래 당나라 사람이었는데 신라에 귀화하여 신라왕으로부터 이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남민의 7세손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 중 맏아들 남홍보(南洪甫)는 영양, 둘째 남군보(南君甫)는 의령, 막내 남광보(南匡甫)는 고성에 각각 관적(貫籍)하여 각 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시조 남민의 15세손인 남징여월동에, 동생인 남연멧마루원종동에 정착하면서 부천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조선 인조 때 진사를 한 남징은 계양팔문장가이다. 남연은 형인 남징과 더불어 계양팔문장가에 속했다. 문집으로 『충장공유사』 2권을 남겼다. 사후 좌승지를 추증하였다. 남징의 아들인 남휘는 생원·진사 양과에 합격했으며, 계양삼호걸 중의 한 명이다. 이후 금부도사를 지냈다. 남연의 아들인 남계는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후 후손들은 멧마루에 정착해 살면서 200년 넘게 멧마루 도당우물제를 지내고 있다.

2. 밀양손씨

밀양손씨(密陽孫氏)의 본관은 경주(慶州)·밀양(密陽)·평해(平海)·구례(求禮)·청주(淸州)·나주(羅州)·부안(扶安)[扶寧]·안협(安峽)·안동(安東)[一直] 등이 전한다. 그 중에서 안동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는 경주를 대종으로 하는 같은 연원의 분파로 알려져 있다. 즉 경주손씨가 큰집이고, 밀양손씨와 평해손씨는 경주손씨에서 분적하였으며, 나머지는 이들 3본에서 다시 갈렸다고 한다. 안동손씨 이외의 모든 손씨의 도시조는 신라육촌 중 대수촌(大樹村)[牟梁部]의 촌장인 구례마(俱禮馬)이며, 그 후손이자 경주손씨의 시조인 손순(孫順)은 모든 손씨의 중시조가 된다.

밀양손씨에서는 예안현감을 지내고 문한(文翰)으로 이름난 손영제(孫英濟), 전적부사·창원부사 등을 역임한 성리학자 손기양(孫起陽),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한 손서륜(孫敍倫),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손덕심(孫德沈) 등이 주요 인물이다. 밀양손씨가 부천에 정착한 것은 군사공 손영파로 손순의 43세손인 손상갑이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산곡리에서 멧마루 안동네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후손 중에서 손재운·손장길·손장석 등이 무과에 병과로 합격하였고, 손창묵과 손창근은 종사랑을 역임하였다. 현재 멧마루에는 밀양손씨의 후손들이 거의 살고 있지 않다.

3. 안동김씨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구(舊)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부천 멧마루에 정착한 구안동김씨의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侍中)이자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인 김방경이다.

‘구안동’은 김방경의 아들과 손자 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김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김흔은 찬성사, 김순(金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김윤(金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김선의 아들 김승용(金承用)은 대제학, 김승택(金承澤)은 평장사, 김영돈(金永暾)은 유명한 무장이며, 김영후(金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는데, 특히 김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안동’의 세계(世系)는 방경의 현손 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 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김영후의 손자들인 김익달의 제학공파(提學公派), 김사렴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김사형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 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金九容]·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金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김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김질, 영의정 김수동(金壽童), 이조판서 김찬(金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 떨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김자점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김제갑과 그의 조카 김시민·김시약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김시양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김휘, 숙종 때의 시인 김득신, 무장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김응하와 훈련대장 김응해 형제, 훈련대장 김중기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부천에 정착한 것은 익원공파의 17세손인 김준수·김현수·김경수 등이 김포읍 운양리에서 멧마루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18세손인 김영모는 통정대부로 종친부 도정을 역임하였고, 김영의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부사를 지냈다. 19세손 김인묵은 참봉을 지냈다. 현재는 멧마루의 도시 개발로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사래이, 상동에 정착한 희천김씨와 덕수이씨]

1. 희천김씨

희천김씨(熙川金氏)의 시조 김우(金佑)는 고려 초에 문하시중을 지냈다. 나라에 공을 세워 신호위대장군이 되어 온양군에 봉해졌다. 시조의 7세손 김용(金用)도 온양군에 봉해졌다. 그 뒤 12세손 김우(金宇)가 조선 태종 때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익대좌명공신이 되어 희천군에 봉해졌다. 그는 벼슬이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오르고 희천을 채읍으로 하사받았다. 또한 양정이라 시호되었으며 희천김씨의 중조가 된다. 그 때부터 본관을 희천으로 바꾸었다.

희천김씨는 당초 온양김씨로, 선산김씨에서 갈려나왔는데,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인 김추(金錘)의 셋째 아들 김우(金佑)가 온양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온양으로 하였다. 희천은 평북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고구려 영토였으나 발해를 거쳐 오랫동안 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 초에 수복되어 청색진이라 하였다. 1217년 서희(徐熙)가 거란의 침공을 막아 위주방어사로 승격되었다. 후에 서희의 이름을 따서 희주(熙州)로 고쳤다가 1413년 희천으로 개칭하였다.

부천에 희천김씨가 정착한 것은 중종 때 문과에 올라 승정원우부승지·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증직된 위주군 김백순이 낙향하면서부터이다. 김백순의 장자인 김규는 춘추관편수관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 승정원도승지, 경연참찬관, 춘추관직제학, 예문관직제학에 증직되었다. 증손인 김엄은 사헌부감찰, 기장현감을 지냈다. 현재는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2. 덕수이씨

덕수이씨(德水李氏)의 시조는 이돈수로 고려 때 중랑장을 지냈다. 덕수는 덕수장씨의 본관인 경기도 개풍군에 위치하며, 시조 이돈수가 덕수현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덕수가 관향이 되었다. 덕수이씨 적성공파가 부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돈수의 19세손인 이형신이 시흥시 도창동에서 사래이, 상동으로 이주를 하면서부터이다. 이후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괴안동에 정착한 안동권씨와 남원양씨]

1. 안동권씨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김행은 고려 태조와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웠다. 태조김행의 전공을 치하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能炳幾達權)”라며 권씨 성을 하사하고 태사(太師)의 작위를 제수하였다. 권행은 태사의 벼슬을 받아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권씨의 시조가 되면서 안동을 식읍(食邑)으로 하는 실제 영주가 되어 이를 그 자손이 세습하였다.

고려 개국과 함께 안동권씨는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권수평(權守平)은 청빈한 관리의 표상으로, 권수평의 증손인 권부(權溥)는 자신을 포함해 그의 아들 5형제와 그의 사위 3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져서 당대구봉군(當代九封君)이라는 명성을 떨쳤다.

안동권씨 족보인 『성화보(成化譜)』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 1476년(성종 7)에 출간되었다. 중국 연호인 성화(成化) 연간에 제작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본래 명칭은 『안동권씨세보(安東權氏世譜)』이다. 수중공파(守中公派)·부호공파(副戶公派)·추밀공파(樞密公派)·복야공파(僕射公派)·동정공파(同正公派)·좌윤공파(左尹公派)·별장공파(別將公派)·부정공파(副正公派)·시중공파(侍中公派)·중윤공파(中允公派)·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대의파(大宜派)·추파(樞派)·검교공파(檢校公派) 등이 있다.

부천 지역 안동권씨권행의 10세손인 권수평을 중시조로 하는 추밀공파이며, 보다 더 세분하면 23세손 권정중을 모시는 정중계이다. 즉 권정중이 이배·원탄미의 난을 평정하고 고얀리괴안동을 사패전으로 하사받으면서 부천과 인연을 맺었다. 34세손 권이하 때 괴안동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했다.

2. 남원양씨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시조 양을나(良乙那)는 제주도에 탐라국을 세웠다고 전한다. 양씨는 모두가 제주양씨에서 분관되었는데, 양을나의 후손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에 들어오자 559년 진흥왕이 벼슬을 내리고 ‘良’을 ‘梁’으로 고치게 하였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양우량(梁友諒)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남원으로 분적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양씨는 제주와 남원으로 분관되었고, 후에 충주로도 분관되어 3적(三籍)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전하는 문헌이 없어 선계는 알 수 없다.

남원양씨는 문양공파·병부공파(兵部公派)·예성군파·청주파·대방군파·용성군파(龍城君派)·장영공파로 계파가 나뉘어져 있다. 고얀리 괴안동에 정착한 남원양씨양을나의 13세손인 문양공 양성지를 중시조로 하는 후예들로 이뤄진 문양공파이다. 이후 6대 150여 년간 살고 있다.

[솔안말로 불리던 송내동에 사는 여주이씨·평산신씨·이천서씨]

1. 여주이씨

여주이씨(驪州李氏)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받드는 교위공파(校尉公派)가 있고,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조(中祖)로 모시는 문순공파(文順公派)가 있으며,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받드는 경주파(慶州派)가 그것이다. 이 3파의 여주이씨 선조들은 다 같이 고려 중기에 경기도 여주에 자리 잡아 대대로 호장중윤(戶長中尹)·향공진사(鄕貢進士) 등 향직(鄕職)을 세습하면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이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상계의 연원을 명백하게 가리지 못하였고 예전부터 서로 뿌리가 같은 동족이라 생각하여 조선 때에는 대동보를 함께 간행하기도 하였다. 부천의 여주이씨는 지평 이지익의 후손인 지평공파로, 이들이 부천에 정착한 것은 시조의 18세손인 이시진이 포천군 포천읍 자작리에서 솔안말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2. 평산신씨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이다. 신숭겸궁예가 세운 태봉의 기장(騎將)이었으나 궁예의 폭정이 계속되자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려를 개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공로로 고려 개국원훈대장군(開國元勳大將軍)에 올랐다.

하루는 왕건이 장군들과 평주[평산]에 사냥을 나가는 도중에 기러기 세 마리를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맞힐 수 있는가?” 하니 신숭겸이 나서서 왕건이 지정한 세 번째 기러기를 명중시키므로 태조가 탄복하여 땅 300결과 평산을 본관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927년(태조 10) 왕건이 후백제와의 대구 공산동 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하자 왕건과 풍채가 비슷하여 대신 어차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하였고 왕건은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에 왕건은 순절한 신숭겸에게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을 추봉하였다.

평산신씨는 이후에 군수공파(郡守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판윤공파(判尹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이상공파(貳相公派)·전서공파(典書公派)·제정공파(齊靖公派)·온수감공파(溫水監公派)·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사간공파(思簡公派)·한성윤공파(漢城尹公派)·정언공파(正言公派)·문희공파(文僖公派)·장령공파(掌令公派)·봉상윤공파(奉常尹公派)·밀직공파(密直公派)로 나누어졌다.

솔안말평산신씨신숭겸의 27세손인 신휘 때 경기도 영자로부터 이주해 와 정착하게 되었다. 신휘는 진사에 합격하고 형조정랑을 지냈다. 이후 10대 280여 년을 살고 있다. 부천여자중학교평산신씨가 심은 느티나무가 현존하고 있다. 현대의 인물로 신능순을 들 수 있다.

3. 이천서씨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신라 52대 효공왕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 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인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 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솔안말이천서씨서신일의 27세손인 서계가 황해도 연백에서 이주하면서 시작했다. 이후 33세손 서채량이 조선 정조 때 통훈대부로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35세손 서병순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외떨어진 대장동에는 반남박씨]

반남박씨(潘南朴氏) 시조 박응주(朴應珠)는 고려조에서 전라남도 나주의 반남호장을 역임했으며, 6세손 박은이 조선 태종 때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익대동덕좌명공신(翊戴同德佐命功臣)에 올라 반남군에 봉해졌다가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봉해진 이후로 오랫동안 세거하게 되어 그 후손들이 박응주를 시조로 반남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반남박씨는 참판공규파(參判公葵派)·세양공강파(世襄公薑派)·부윤공훤파(府尹公萱派)·지후공인파(祗候公仁派)·교위공귀근파(校尉公貴謹派)·학생공영창파(學生公永昌派)·도사공진창파(都事公震昌派)·정자공충파(正字公?派)·감찰공현수파(監察公玄修派)·학생공초생파(學生公初生派)·직장공송생파(直長公松生派)로 나뉘어 있다. 박응주의 15세손인 박원만이 경기도 수원에서 인천 남구 학익동으로 낙향한 후, 그 증손인 박사온대장동에 정착하면서부터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도당동에는 은진송씨]

은진송씨(恩津宋氏)는 중국 경조에서 나온 성씨로 당나라에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송주은(宋柱殷)의 후예로 전해지고 있다. 은진송씨는 여산송씨(礪山宋氏)와 근원이 같아,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아우 송천익(宋天翊)이 은진에 세거하였다고 『여산송씨족보』에 실려 있으나 증빙할 자료가 없다. 송천익 이후의 세계를 밝힐 수 없어 고려 때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에 봉해진 송대원(宋大源)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은진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은진송씨는 크게 3대종파(三大宗派)·합파(合派)·분파(分派)로 나뉜다. 3대종파에는 목사공파(牧使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가 있고, 합파에는 안악공파(安岳公派)·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참봉공파(參奉公派)·송담공파(宋潭公派)·승사랑공파(承仕郞公派)·습정공파(習靜公派)·수옹경헌공파(睡翁景獻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집의공파(執義公派)가 있다.

분파에는 삼가공파(三嘉公派)·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사우당효정공파(四友堂孝貞公派)·동춘당문정공파(同春堂文正公派)·판관공파(判官公派)·추파공파(秋坡公派)·우암문정공파(尤菴文正公派)·동파공파(東派公派)가 있다. 부천의 은진송씨는 삼가공파 20세손 송헌도가 도당동에 정착하여 6대 150여 년간 살고 있다.

[범박동에는 파평윤씨]

파평윤씨(坡平尹氏)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918년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開國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龍淵)에서 옥함(玉函)이 물 위에 떠오르면서 그 안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따라서 윤신달 이전의 자세한 세계(世系)는 알 수 없지만, 후손들이 파평을 세거지로 하면서 토착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윤신달의 5세손인 윤관(尹瓘)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냈다. 1107년(예종 2) 여진정벌에 원수(元帥)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東北界)에 출전하여 함주(咸州)와 영주(英州)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개선하였다. 이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어 영평현(鈴平縣)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졌다. 영평은 파평(坡平)의 별호이므로 후손들이 파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윤관은 후에 벼슬이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러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파평윤씨는 함안파(咸安派)·남원파(南原派)·덕산군파(德山君派)·문정공파(文定公派)·신녕공파(新寧公派)·대언공파(代言公派)·봉록군파(奉祿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야성파(野城派)·전의공파(典儀公派)·소정공파(昭靖公派)·원평군파(原平君派)·소도공파(昭度公派)·판도공파(版圖公派)·소부공파(小府公派)·대위공파(大尉公派) 등이 있다. 이중 범박동에 정착한 것은 파평윤씨 소부공파로 윤신달의 26세손 때부터이다.

[깊은구지 진말 양주조씨]

양주조씨(楊州趙氏)의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때 양주호장(楊州戶長)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문헌이 실전되어 선계를 상고할 수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고려 때 사람인 조군우(趙君祐)의 손자이며, 조경질(趙景質)의 아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란 때 피해를 입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번성하여 가문을 일으켜 세워 그를 시조로 삼고 양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양주조씨는 시조의 증손대에서 4개 파로 나뉘어졌다. 의정부좌참찬을 지낸 조계생(趙啓生)을 파조로 하는 정평공파(靖平公派), 강화부사를 지낸 조유중(趙惟中)의 강화공파(江華公派), 병조판서를 지낸 조말생(趙末生)의 문강공파(文剛公派),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조종생(趙從生)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시암공 조상우의 장령공파(掌令公波) 등으로 나뉘어졌다. 깊은구지 진말에 정착한 것은 조잠의 18세손인 조진한이 1820년에 이주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장령공파이다. 그 후 21세손인 조윤희가 종5품 금부도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2.13 한자 이름 수정 이보(李補)->이보(李𥙷)
2013.03.08 [사래리인 역곡2동에 정착한 죽산박씨] 수정 <변경 전>박문필의 장남인 박기남은 <변경 후>박문보의 장남인 박기남은
2011.01.03 계양팔문장가 삭제 [밀양변씨 집성촌 강상골] 문단에서 변혁조를 수식하던 계양팔문장중 1명이라는 단어를 삭제
이용자 의견
정** [내동에 이주한 전주이씨]
1.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태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에서 효령대군의 휘자 補를 𥙷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대군의 휘자는 衣변이 아니고 示변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에도 함께 수정 하여 주십시오
  • 답변
  • 디지털부천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한자를 수정하였습니다.
201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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