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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기업은 창업주의 실천정신에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A020402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지

기업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공유물임을 설파한 유한양행의 신화, 유일한 박사

국내 기업인들 중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과거 친일행적은 물론 정경유착, 각종 탈세 등으로 사회적인 명망을 얻기보다 비판의 대상이 돼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다르다. 그는 일찍부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재산의 사회 환원을 통해 “기업은 개인이 아닌 사회의 공유물”이라는 신념을 회사 내에 뿌리내리게 하여 온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몇 안 되는 기업인이었다.

유일한 박사가 유한양행을 설립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던 지난 1926년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대중들을 위해 우리 손으로 우리 약을 만드는 회사가 있어야 된다는 신념에서 출발했다. 1930년대에는 연구소도 설립해 수입 판매해 오던 의약품들을 자체 개발하고 동남아 등지에 진출하기도 했다. 1936년 개인소유의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고 주식의 일부를 임직원들에게 나눠주었다. 요즘의 표현으로 한다면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한 것이다. 또 1962년에는 임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약회사로는 최초로 주식을 상장하고 회사를 공개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기업의 경영을 정치권으로부터 철저히 독립시키려 했다. 그가 본격적인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위해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회사가 성장기를 지나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인 1954년부터다. 그는 사재를 털어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세웠고 1960년에는 ‘한국직업학원’, 1964년 유한공고, 1966년 유한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의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기업과 개인적인 정실(情實)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며 전문경영인제도를 도입했다. 기업을 키우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경영을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회사를 맡겨야 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유한양행 경영권을 주주총회를 통해 전문경영인에게 넘긴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한다. 기업이 개인의 것이 아닌 사회의 공유물이라는 신념을 표명한 것이었다. 또한 생전에 유한양행의 주식 중 40%를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하는 등 자신이 소유한 거의 주식을 사회에 넘겼다. “이윤추구는 기업성장의 선행조건이지만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그의 생각을 현실로 옮긴 것이다.

유일한 박사를 거론할 때 항상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라는 표현이 따라다닌다. 그에게 있어서 기업은 사회의 것이고 따라서 절대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난 1971년 4월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이 언론에 최초로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그가 소유했던 유한양행 주식 14만 941주(당시시가 2억 2천 5백만 원)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으로 기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딸 유재라 씨에게 그의 묘소가 있는 5,000평의 대지를 상속해 ‘유한동산’으로 꾸미도록 했을 뿐이며 손녀에게도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320만원)를 남긴 것이 전부였다. 미국에 있던 장남 유일선 씨에게는 일체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너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라는 말만을 남겼다.

더욱이 딸 유재라 씨도 1991년 미국에서 숨을 거두며 당시로 45억 원 상당의 유한양행 주식과 전 재산을 공익재단인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2대에 걸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신화를 이룩했던 것이다. 재벌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업인들이 누대에 걸쳐 기업경영을 세습하고 어떻게 하면 재산을 불릴 수 있을까라는 것에만 힘을 쏟는 오늘의 실정에서 유일한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의 전설로 남기에 충분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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