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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B020203
지역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택희

“밤에 아이들이 서리를 하러 오면 콩깍지들이 부스럭하고 소리를 낸다고요. 그걸 큰형이 용케 듣고는 부리나케 쫓아가곤 했죠.”

작동에는 봄이면 온 천지가 분홍 복사꽃과, 흰 배꽃, 사과꽃으로 꽃 세상이 된다. 사시사철 자연송이, 배, 사과를 선사해 주는 천혜의 자연마을. 자연먹거리에 의존해 왔던 이 마을은 한 해 농사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산 비탈길이 많은 마을에서 논농사보다 밭농사의 비중이 더 컸다. 초여름 이모작을 할 때쯤이면 꽃이 흔한 작동은 그야말로 꽃 천지가 된다. 하지만 꽃향기만 물씬 풍기는 것은 아니었다. 화학비료가 없었을 때 인분은 퇴비 역할을 톡톡히 해서 시골에서는 코를 싸매야 할 정도로 강한 냄새들이 진동하곤 했다.

마을을 지나다 과수원에 계시던 환갑 정도 되신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낯선 이방인을 힐끔 보며 빙그레 웃으신다. 무엇을 하시고 있는지 보았더니 상하지 말라고 싸놓은 종이봉지를 조심히 들춰보시면서 더위에 말라버린 포도송이를 걸러내고 계셨다. 잠깐 말동무를 해드리며 거들자 금세 이것저것 작동 포도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일교차가 큰 산간지대에서 자라기 때문에 껍질이 얇고 당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농약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품질의 포도가 생산된다고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포도 농사로 자식들 학교도 보내고 시집장가도 보내셨다고 한다.

이처럼 산지 농사는 작동 주민들의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에 마을 어른들은 한 해 농사의 결과를 두고 시름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무릉도원과 다름이 없었다. 낮이나 밤이나 몰래 슬금슬금 들어가서 포도, 수박, 복숭아 닥치는 대로 따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집집마다 과수원을 지키려는 꼬맹이 경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서는 제일 막내였는데 형들이 항상 과수원을 지키고 관리하라고 나를 보냈어요. 그런데 하도 많이 하다보니까 한 바퀴만 돌고나면 대충 상황파악을 할 수 있었어요. 과일이 잘 익었는지 누가 몰래 따갔는지 말예요. 그렇게 해서 이놈들이 왔나 안 왔나를 가늠하곤 했죠.”(민동훈, 작동 주민, 1947년생)

갑자기 서리밭주인이 등장할라치면 그야말로 과수원에서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별이 총총한 밤에 때 아닌 숨바꼭질로 진땀 꽤나 흘렸을 꼬마 서리꾼들. 운수 나쁘게 잡혀도 꿀밤 한 대로 무마시킬 인정은 남아있는 때였지만 적어도 주인에게 많은 손실을 초래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아이들이 따가는 복숭아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서리를 하면서 복숭아밭을 밟고 지나가 밭이 엉망이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복숭아를 지켜야 하는데 혼자서 다 일일이 지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큰형이 항상 나무 바닥에 콩을 심었어요. 왜냐면 밤에 아이들이 서리를 하러 오면 콩깍지들이 부스럭하고 소리를 낸다구요. 그걸 큰형이 용케 듣고는 부리나케 쫓아가곤 했죠.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있는 일이었어요.”(민동훈, 작동 주민, 1947년생)

하지만 한여름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면서 느끼는 낭만도 있었다. 민동훈 씨는 형과 나란히 누워 원두막에 누워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던 일들을 떠올렸다. 더운 날씨에 쏟아지는 잠을 쫓아주는 효과도 있었고 음악을 가까이 듣기 위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서리꾼들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에 라디오는 플래시와 더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였다고 한다.

“그때는 라디오도 트랜스 라디오였어요. 전화도 없을 때니까요. 제가 군대를 제대할 때가 25살 때인데 제대하고 오니까 동네에 전화가 막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 우리 집하고 친구 경돈네, 담배집 할아배네까지 딱 세 집에 전화가 들어왔어요. 그래 원두막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누워있으면 아직 7월이라서 여치, 베짱이, 귀뚜라미 울음소리 외에는 들리는 게 없어요. 그러다가 울음소리가 딱 그쳐요. 그 때가 서리를 온 거니까요. 그럼 형이랑 나랑 땅에 떨어진 개복숭아를 막 들고 던지면서 쫓기만 한 거예요.”(민동훈, 작동 주민, 1947년생)

옛날에는 복숭아나 참외, 수박을 심은 밭에는 으레 밭을 지키기 위하여 밭머리나 밭 한가운데에 원두막을 지었다. 원두막은 기둥 4개를 세우고 꼭대기에 보릿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만들고 그 밑에 판자나 통나무로 높게 바닥을 만든다. 사방은 보릿짚이나 밀짚을 엮어 상하로 개폐식으로 하여 더우면 막대기로 버텨 열도록 되었으며, 땅에서는 사다리를 놓아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보리나 밀을 베고 그 밭에 주로 참외, 수박을 심기 때문에 원두막을 지을 때는 보릿짚과 밀짚이 흔하다. 원두라는 말은 원래 참외, 오이, 수박, 호박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이중에서도 수박이나 참외, 딸기 등은 현장에서 서리하는 버릇을 막기 위하여 원두막을 짓고 지켰다. 서리는 당시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의미를 지녔으며, 친구들과 재미있는 놀이를 즐기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비록 서리를 하다 걸리면 주인에게 크게 혼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먹거리를 찾아, 놀이를 위해 서리는 계속 이어졌다.

오후에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참외밭이 곁에 있는 개천가에서 멱을 감으면서 원두막의 동향을 살핀다. 배가 홀쭉해지면 또래 아이들은 근처 참외밭을 살살 잠입해 들어간다. 두서너 명은 원두막에서 낮잠 자는 주인의 동향을 살피고 한두 명은 살금살금 기어서 밭 가장자리에 가서 얼른 한두 개를 따서 줄행랑을 친다. 그리고는 헉헉거리며 익지도 않은 새파란 참외를 이빨로 아삭아삭거리며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웠다.

그 맛이 어찌나 좋은지 먹다 보면 참외 꼭지까지 다 먹어 치우게 되곤 했다. 그래서 참외서리 뒷맛은 쓴맛이 된다. 참외서리는 번번이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개구쟁이들이 참외밭 근처에서 멱을 감고 있으면 주인 할아버지는 끝까지 개천가에 서서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그러면 아이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아예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서리할 때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리를 하다보면 여름 같은 경우에는 더우니까 옷을 적게 입잖아. 그러면 복숭아는 많이 땄는데 가져갈 방법이 없으니 안에 옷을 둘둘 말아서 담아서 가지고 갔지. 근데 그러면 복숭아에 나있는 털 때문에 엄청 가려워서 한참을 고생하기도 했지. 사실 이런 경우는 서리할 때보다는 과수원을 하고 있는 친구네 집에서 복숭아를 수확하고 나면 복숭아가 많이 남기 때문에 친구들 어머님께서 집에 가지고 가서 먹으라고 싸 주시는데 마땅히 가져갈 곳이 없으니 옷에다가 대충 말아서 집에 가져가는 경우가 더 많았지. 그러다보면 복숭아털 때문에 가려워서 고생을 하는 거지.”(민동훈, 작동 주민, 1947년생)

특히 밤은 개구쟁이들에게는 좋은 서리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고서는 더위와 모기를 피해 동구 밖 버드나무 아래로 대여섯 명의 서리꾼들이 마실을 나왔다. 저녁으로 먹은 보리밥이 금세 소화가 되어버리고 밤이 으슥해지면 마음은 복숭아나 참외밭으로 향했다.

서리꾼들 가운데 뜀박질을 잘하는 돌격대가 옷을 홀랑 벗고,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개천가의 진흙으로 온몸을 검게 위장한다. 그리고는 복숭아나 참외밭 근처까지 기어갔다. 또 다른 한 명은 원두막 근처에서 주인의 동태를 파악하고는 뻐꾸기 소리로 알려주었다. 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서리가 시작됐다. 주인도 뻐꾸기 소리가 나면 으레 서리를 할 것으로 알고, 아예 큰소리로 “다른 복숭아나 참외 상하지 않게 조심해라”하고서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복숭아나 참외 서리에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서리를 하되 주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리한 복숭아나 참외는 그저 요기나 할 정도로 해서 서리한 그 자리에서 당장에 먹어 치웠다. 여름철의 복숭아나 참외 서리, 수박 서리 뿐만 아니라 봄에는 밀 서리, 가을에는 콩 서리와 사과 서리, 겨울에는 닭 서리까지도 했다.

한여름 밤 복숭아 서리, 참외 서리, 수박 서리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그 시절 아이들에게 지금도 유쾌하고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정보제공]

  • •  민동훈(작동 주민, 194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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