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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금지를 당하지 않는 구루마 복숭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D020202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웅규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에 구루마에 복숭아를 가지고 나오시는 분들은 묵인을 해줬어요.”

1946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 1호에 따라 치안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서울과 인천을 대상으로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88올림픽 유치 직후였다. 밤 12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2인 1조 야경꾼들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면서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쳤다.

통금에 걸리면 파출소를 거쳐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었는데 이 또한 이제는 옛 시절의 추억이다. 그런데 이렇게 강압적이고 제약이 많았던 통행금지도 송내동의 현실을 고려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통행 묵인을 해 주는 일이 있었다. 농민들의 활동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서였다.

사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복숭아 과수원은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송내동 사람들은 그들의 과수원에서 인부로 일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곧 해방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송내동 주민들이 본격적인 과수원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송내동에는 통금에 대한 불문율이 생기게 되었다.

“복숭아를 따서 시장까지 싣고 가야 하는데 옛날에 교통수단 이라는 게 구루마, 경운기뿐이었거든요. 여하튼 수확을 해서 깡시장까지 가져가야 하니까요. 주로 거기에 위탁을 해서 팔았어요. 그러면 새벽에 시장에 들어가야 한단 말이에요. 우스운 얘기지만 그 때 여기에는 통행금지가 있었는데 시에서 통행금지를 묵인해줬어요. 통행금지가 4시까지였는데 우리가 깡시장에 갈 때는 물건을 받으러 오는 상인들 때문에 새벽같이 서둘러야 해요. 가서 준비를 하고 복숭아를 골라 놓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2, 3시에 출발을 해요.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이지만 어쩌겠어요. 그래서 구루마에 복숭아를 가지고 나오시는 분들은 묵인을 해줬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봐주는 거죠. 거의 그랬어요.”(박순규, 부천새마을금고 이사장, 1952년생)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다양하지 못해서 과일전문위탁판매 장소인 깡시장까지 물건을 운송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복숭아 박스 하나를 나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새벽길을 다녀야만 했던 복숭아 생산 농민들에게 이 지역의 관리들도 통금 단속에서 제외시킴으로써 행정적 편의를 베풀었던 것이다. 그만큼 송내동에서 복숭아는 주민들의 생업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복숭아 수확기가 되면 온 가족, 온 마을 사람들이 달라붙어 바쁜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어린 학생들은 복숭아를 수확해야 하는 여름방학 시기가 오면 힘든 일을 피해 도망가기 바빴다.

“지금의 부천 남부역 다음 마을이 바로 여기였어요. 중간에 마을이 없었단 얘기죠. 마을이 없는 그 사이에 복숭아밭만 있었어요. 경인국도를 타고 위쪽으로 다 산이었고 밭이었다고 보면 되죠. 복숭아 수확기에는 대단했어요. 저는 그래서 우스갯소리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여름방학이 싫었어요. 왜냐하면 방학이 되면 놀지는 못하고 복숭아만 죽어라 따야 했기 때문이죠.”(박순규, 부천새마을금고 이사장, 1952년생)

송내동 아이들은 모두 농민의 아이들이었다. 부모님 모두 땅을 일궜기 때문에 삶의 출발과 끝이 땅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제 어른이 된 장난꾸러기들은 가난했지만 내내 행복한 어린시절이었다고 추억한다.

[정보제공]

  • •  박순규(부천새마을금고 이사장, 195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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