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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231
한자 獨立運動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천경화

[정의]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부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운동.

[개설]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경기도 부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운동을 말한다. 부천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분야별로 농민운동을 비롯하여 노동운동, 청년학생운동, 계몽운동과 노동야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농민운동]

부천 지역 농민운동은 각종 농민단체의 설립과 농민의 단체행동으로 나타났다. 1924년 서곶면 가좌리에서 이교대 외 3명의 소작인이 인천경찰서에 마름 서상춘의 횡포를 고소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27년에는 부평수리조합 설립 후 수리조합 구역 내 지주 3백여 명이 담합하여 지주회를 결성하였다. 지주들이 구답(舊畓)과 신답(新畓)의 소작료 인상을 주장하자, 4천여 호의 소작인들은 소작료 인상에 대한 농민조합을 발기하여 농민 항거를 결정하였다.

1929년 10월에는 당시 부천군 계남면 소사리에서 부평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경기도 지방에서 일어난 최초의 소작인 반항운동이었다. 조지풍과 이진성이 중심이 되어 부천군 6개면 단위지부를 설립하여, 1928년 초 회원수가 378명에 이르렀다. 부평농민조합은 농민 간의 친애를 바탕으로 위난(危難)을 극복하고, 농사를 개량하여 농촌의 개발향상을 기한다는 목적 아래 설립되었다.

소작농, 소작 겸 자작농, 피용농민 등이 모두 포함되었고, 서무부·교육부·연구부·조사부·선전부·조직부·재정부를 설치하여 지주측과 단체교섭을 추진하고 지주회와 교섭할 10가지 조항을 결의하였다. 교섭위원은 이종명·조지풍·장영섭 등이 맡았으며 교섭 결과 소작인의 요구사항이 모두 수용되었다. 1920년대 이후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농민단체로는 북도부민회(北島富民會), 부천군농회, 부평농민조합, 삼도어민연합어업조합, 경기도 농촌진흥위원회 등이 있다.

[노동운동]

부천 지역에서는 다양한 부문에서 노동운동이 전개되었다. 1927년 9월 30일 소사역장이 사소한 일로 하역 노동자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역장의 징계를 요구하는 동맹파업이 단행되었다. 또 1935년 6월 13일에는 부천군 남동면 논현리에 소재한 전매국 남동출장소의 염전노동자 81명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그밖에 공장이나 광산 분야에서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항하여 동맹파업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쟁의를 전개하였다.

[청년·학생운동]

1920년대 부천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독립운동은 청년·학생운동이었다. 특히 학생들은 비밀결사운동과 동맹휴학투쟁을 전개하였다. 각종 청년단체가 결성되어 강연·야학 등 다양한 계몽활동을 펼쳤다. 부천 지역의 청년운동으로는 1923년 10월 9일 결성된 모도소년회 활동이 있다. 모도소년회는 부천군 북도면 모도감리교회에서 조직한 것으로, 이성복[회장]·유재희[부회장]·김수익[총무]·홍기봉[재무]·유배근[서기]·조성준 외 6명으로 구성되었다.

동경대지진 및 서선수해의 이재민을 위해 구호품 모집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0월에는 기독교사각소년회가 조직되어 놀이를 통해 선교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3년에는 다주면의 유지 이범영 등이 주축이 된 다주면청년회와 모도엡웻소년회가, 1924년에는 영종청년간친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의 학생운동으로는 1921년 8월 부천공립보통학교 3학년 학생들이 담임교사의 실력부족 및 자질문제, 학생 모독으로 동맹휴학을 결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1922년에도 일본인 교장의 한인교사 및 한인 학생에 대한 민족적 모욕과 차별에 저항하는 동맹휴학을 하였다.

1922년 12월 1일에는 부천군 문학면에서 청년 25명이 소성청년회를 창립하였다. 김창진[회장]·이상국[총무]·이창구[덕육부장]·황광수[지육부장]·이연근[체육부장]·이구범[서기]·이원홍[회계]·이규하[간사]·이준경·이운선 등을 임원으로 하여, 교의친목과 생활향상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1923년 1월에는 부인야학과 노동야학·영어야학 등을 운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밖에 인천항에서 20해리 떨어진 당시 부천군 북도면 신도신흥학교 교사 황도문의 지도 아래 신도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임원으로는 전창실[회장]·정정옥[부회장]·나동한[간사]·김봉조[간사] 등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소년문제 계몽을 위한 강연회 개최, 동경대지진 및 서선수해 이재민 구호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계몽운동과 노동야학]

일제강점기에는 또한 계몽운동을 통한 노동야학이 성행하였다. 부천 지역의 노동야학으로는 동리교회 야학, 부인 야학, 고잔리 야학, 일신 야학, 보급강습소 등 5개가 있었으며, 문학면·남동면·다주면 등에서 활동하였다. 교사들로는 오재협·김동수·김한수·이재동·김명동 등이 활동하였고, 고잔리 야학이 80여 명으로 학생들이 가장 많았으며 전체적으로는 약 150여 명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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