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2004 |
---|---|
한자 | 韓國最初-素砂- |
영어의미역 | Sosa Peach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한도훈 |
[개설]
부천을 상징하는 꽃은 복숭아나무의 꽃, 즉 복사꽃이다. 부천은 복사꽃이 많이 피는 고을이라 하여 복사골이라고도 불린다. 1902년 부천 지역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복숭아 재배가 시작된 이래 부천의 복숭아는 소사 복숭아라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부터 재배 면적이 크게 늘면서 소사 복숭아는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소사 복숭아는 수원의 딸기, 안양의 포도와 함께 경기도 3대 과일로 꼽혔고, 또한 구포의 배, 대구의 사과와 함께 전국 3대 과일로 유명해져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그러나 1970년을 절정으로 이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부천에서 복숭아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부천이 도시화되면서 복숭아밭에다 소사공단·송내공단을 만들면서 복숭아나무를 모두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현재는 충청북도에서 복숭아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영동 지방이 복숭아 산지로 유명하다. 부천은 이름만 복사골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소사 복숭아의 명성을 되살리려면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어야 하는 데 안타깝게도 부천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을 만한 터전이 남아 있지 않다.
[소사와 복숭아의 의미와 역사]
소사는 부천의 옛 지명 중 소새의 다른 말이다. 소새는 ‘새벽빛이 밝게 빛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현재 부천시의 소사본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복숭아는 장미과 벚나무속에 속하는 복숭아나무의 열매이다. 원산지는 중국이다. 복숭아나무는 복사나무라고도 부른다. 3~5m쯤 자란다. 우리나라에서 사과나무, 귤나무, 감나무, 포도나무에 이어 많이 기르는 과일 나무이다. 4~5월에 잎이 나기 전에 연분홍빛 꽃이 핀다. 꽃은 묵은 가지에서 피고, 잎은 길쭉하고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다른 종으로 흰 꽃이 피는 백도와 홍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복숭아 재배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102년(파사이사금 23)과 203년(나해이사금 8) 기사에 이미 복숭아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재배 기원은 매우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복숭아가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의 과일 중의 하나로 소개되어 있다.
허균의 『도문대작(屠門大嚼)』(1615)에는 자도(紫桃)·황도(黃桃)·반도(盤桃)·승도(僧桃)·포도(浦桃) 등 5품 종이, 『해동농서(海東農書)』(1776~1800)에는 모도(毛桃)·승도(僧桃)·울릉도(鬱陵桃)·감인도(甘仁桃)·편도(遍桃)·홍도(紅桃)·벽도(碧桃)·삼색도(三色桃) 등 9품 종이, 1910년대에 경기도청에서 조사한 경기도 재래종 복숭아 품종으로 오월도(五月桃)·6월도(六月桃)·7월도(七月桃)·8월도(八月桃)·승도(僧桃)·감향도(甘香桃)·시도(枾桃)·지나도(支那桃)·소도(小桃) 등 10품 종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하늘에서 열리는 과일, 복숭아]
복숭아는 귀신을 쫓는다는 속신이 있는 과일로 이런 의미에서 복숭아는 다른 과일과 달리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 사과나 배, 대추, 밤 등은 제사상에 즐겨 올리는 반면 복숭아는 올리지 않는 것이다. 복숭아를 올려 제사상을 받아먹기 위해 온 귀신을 쫓으면 집안의 복이 모두 달아나기 때문이다. 무당들이 복숭아나무 가지로 귀신을 쫓는 행위를 하는 것도 같은 연유에서이다.
복숭아는 서왕모(西王母)와 천도복숭아라는 전설과 관련되어 장수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서왕모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곤륜산에 살며 칠월칠석에 아홉 빛깔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왔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서왕모가 불사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데 불사수라고도 하고 천도복숭아라고도 하였다. 서왕모의 천도복숭아를 동방삭이 훔쳐 먹었다. 동박삭은 자가 만천이고 염차(厭次)[현 산동성 평원현 부근] 사람으로 막힘이 없는 유창한 변설과 재치로 한무제(漢武帝)의 사랑을 받아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동방삭은 한무제의 사치를 간언하는 등 근엄한 일면도 있었다. 동방삭은 ‘익살의 재사’로 많은 일화가 전해지며, 부국강병책을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자조(自嘲)하여 남긴 「객난(客難)」과 「비유선생지론(非有先生之論)」을 비롯한 약간의 시문을 남겼다.
이미 한나라 때부터 황당무계한 문장을 동방삭의 이름으로 가탁(假託)하는 일이 많아 『신이경(神異經)』, 『십주기(十洲記)』 등의 저자라고 전해지나, 모두 진(晉)나라 이후의 위작(僞作)으로 추측된다. 속설에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3,000년을 장수하였다 하여 ‘삼천갑자 동방삭’으로 일컬어졌으며 현재는 ‘오래 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그 뜻이 바뀌어 쓰이고 있다. 이처럼 복숭아는 하늘에서 열리는 과일로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않고 장수한다는 전설이 있어 이 전설에서 유추하여 복숭아가 장수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 도화동과 관련된 전설도 있다. 아득한 옛날 서울 도화동 복사골에는 마음씨 착한 김씨 성을 가진 노인이 무남독녀였던 도화낭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 낭자의 아리따운 모습과 착한 마음씨가 천궁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옥황상제의 며느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김 노인은 딸이 천궁으로 출가하는 것이 기쁘기는 하였지만 외동딸과 영영 이별하게 되어 서운한 마음이 이를 데 없었다.
김 노인의 심경을 애처롭게 생각한 선관은 천상의 천도복숭아를 주고 갔는데 김 노인은 이 복숭아씨를 집 근처에 심고 복사나무가 자라 꽃이 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며 지냈다. 그후 김 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사나무는 번성하고 이웃 사람들 또한 김 노인과 도화낭자를 생각하며 복사나무를 많이 심어 일대가 모두 복사꽃밭을 이루었다는 전설인데, 다시금 옛날 이곳 도화 풍경의 신비경을 상상하게 한다. 이밖에 복숭아의 빛깔에서 유추된 간사하다는 의미가 있고, 태몽으로는 아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 소사 복숭아인가]
부천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성주산을 중심으로 야생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복숭아나무는 배수가 잘되는 남향·남동향·남서향의 완경사지가 재배지로 좋으며, 연 평균 기온이 섭씨 11~15℃가 되는 지방에서 잘 자라고, 최적의 생육 조건은 섭씨 20~30℃의 온난 기후이다. 이런 복숭아나무의 꽃이 부천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고, 복사꽃이 많이 피는 고을이라 하여 복사골이라 부른다.
부천에서 개량된 복숭아나무가 처음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짓밟기 시작한 1900년대 초부터이다. 현재와 같은 복숭아 품종으로 복숭아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소사 부근의 소사농원에서부터이다. 다음 해인 190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이었던 인천역의 역장을 지낸 일본 사람 다케하라가 재배하기 시작하여 일본인들이 대거 심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토지 조사 사업 등의 명목으로 조선총독부를 등에 업고 우리 국토를 마구잡이로 빼앗아 자기들 구미에 맞는 작물을 재배하였는데, 그때 부천 지역에서 복숭아나무가 재배되었던 것이다. 1904년 소사 부근의 한 농장에서는 천진 등 4품 종이 재배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인 1904년 이후에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이 된 송병준이 소사 부근에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복숭아 품종을 재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현대적인 복숭아 재배는 부천의 소사에서 시작된 셈이고, 그래서 ‘소사 복숭아’라는 명칭이 붙었던 것이다.
실제 이들 도입 품종들의 본격적인 재배는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모범장이 설치되면서 미국·중국·일본으로부터 도입된 품종들이 재배 시험을 거쳐 일반에게 보급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25년경부터는 재배 면적이 크게 늘어 소사 복숭아는 이때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재배 지역도 소사 지역에서 괴안동·깊은구지·솔안말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소사 복숭아는 수원의 딸기, 안양의 포도와 함께 경기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가장 맛있는 세 가지 과일 중 하나로 꼽혔으며, 구포의 배, 대구의 사과와 함께 전국 3대 과일로 유명해져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당시 생산된 품종은 조생수밀도·천진·기영·유행조생종·사용·소림·상해중생종·백도·명일·금도만생종 등 10여 종에 이르렀다. 이렇게 생산된 복숭아는 경제적·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소사 명산’이라는 이름을 붙여 서울의 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과 인천 등지로 출하되었고, 한때는 평양과 신의주를 비롯하여 만주의 안동, 봉천까지 출하하기도 한 명물이 되었다.
복사골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도화동과 관련해서는 조선 고종 때 편집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서부 용산방과 도화동이 너무 넓어 내동과 외동으로 구분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인 1943년 당시 서울 성 외곽 8면 대부분이 고양군에 속하게 될 때도 도화동은 경성부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복숭아 재배가 인기를 끌면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150정보(45만 평)에서 연간 30만 관(1,125통)을 생산하는 등 호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1970년을 최고의 절정으로 하여 이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부천에서 복숭아나무를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 초부터 부천의 도시화 과정에서 복숭아밭에다 소사공단·송내공단을 만들기 위해 복숭아나무를 모두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소사 복숭아의 명성을 살려 솔안말에서는 해마다 2차례씩 복사골축제가 열리고 있다. 복사꽃이 피는 봄과 열매가 맺히는 여름에 각각 열린다.
[복사골의 명맥을 잇는다]
현재 ‘복숭아꽃이 피는 마을’인 복사골의 흔적은 찾아보기 쉽지 않으나 솔안말에서 어렵사리 복숭아를 재배하고 있는 이가 있다. 그가 바로 이승근으로, 2대째 90여 년을 내려온 복숭아 농장을 지키고 있다. 1960년대 아버지로부터 복숭아 과수원을 넘겨받아 지금까지 송내동 313번지 일대[성주중학교 뒤편] 약 8,000평의 면적에 1,000여 그루를 기르고 있는데, 현재 부천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이승근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후반부터 소사에서 과수원을 운영했다. 이후 1970년대 초까지는 송내 북부역과 남부역 일대 등 7군데에서 2만 평 넘게 과수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승근의 말에 따르면, 1970년대 중반까지 복숭아 재배는 마을 축제였다고 한다. 솎아내기와 봉투 씌우기 작업을 할 때면 온 동네 아줌마들이 모두 복숭아나무에 매달려 작업하곤 했다. 비가 온 후에는 어린애들이 갓 떨어진 복숭아를 얻어먹으려고 원두막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경인국도와 철로 변을 따라 잇달아 펼쳐진 과수원은 장관 중의 장관이어서 한여름에는 서울과 인천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과수원에 직접 찾아오는 관광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초 부천이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에 휩싸이면서 복숭아 과수원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이승근의 과수원 7곳 중 6곳도 도시 계획으로 부천시로부터 강제 수용을 당해 모두 없어졌다. 남은 곳도 몇 번이나 사라질 뻔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 부천시가 대대적으로 복사골 이미지 살리기에 나서면서 이승근의 과수원이 부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1997년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복숭아 축제가 열렸다. 당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소사 명산인 소사복숭아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이후 매년 7월 말이면 복숭아 축제가 열려 주민들과 함께 하는 복사골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또 자연 학습장으로 지정되어 매년 15,000여 명의 어린이들이 찾아온다. 4월 중순 개화기 때와 7월 말~8월 초 수확기 때 과수원은 어린이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현재 전국에서는 충청북도에서 복숭아를 제일 많이 생산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영동 지방이 복숭아 산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부천은 이름만 복사골로 남아 있다. 앞으로 소사 복숭아의 명성을 되살리려면 복숭아를 많이 심어야 하는 데 안타깝게도 부천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을 만한 터전이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