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6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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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詠永慕堂新成 |
영어공식명칭 | Build Yeongmodang And Recite Poems |
이칭/별칭 | 「영모당을 새로이 짓고 읊다」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53년 - 「영영모당신성」 저자 손처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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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00년 - 「영영모당신성」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영영모당신성」 저자 손처눌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784년 - 『모당집』에 「영영모당신성」 수록하여 간행 |
배경 지역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 |
성격 | 한시|칠언절구 |
작가 | 손처눌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에 제향된 손처눌이 1600년 영모당을 새로 짓고 읊은 한시.
[개설]
「영영모당신성(詠永慕堂新成)」의 저자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서사원(徐思遠)[1550~1615], 곽재겸(郭再謙)[1547~1615], 류요신(柳堯臣)[1550~1618]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구의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의 선영 아래 영모당(永慕堂)을 짓고 강학 활동을 펼쳤다. 82세에 영모당에서 숨을 거두었고,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영영모당신성」은 2001년 발행한 『국역 모당선생문집(國譯慕堂先生文集)』에서 쉬운 우리말로 제목을 풀이하여 「영모당을 새로이 짓고 읊다」라고 표기하였다.
[구성]
「영영모당신성」은 칠언절구(七言絕句) 두 수(首)이다.
[내용]
「영영모당신성」 첫 번째 수이다.
염여풍파난착각(灔澦風波難着脚)[휘몰아치는 풍파에 발붙이기 어려웠고]
쟁영세월이쇠안(崢嶸歲月已衰顔)[험난한 세월 덕에 얼굴은 노쇠하여졌네]
경영불시요관미(經營不是要觀美)[아름다움 보이고자 집 지은 것 아니오]
의작토구백세안(擬作菟裘百歲安)[편안하게 영원토록 은거하기 위함이네]
「영영모당신성」 두 번째 수이다.
청창효일재여지(晴牎曉日齋余志)[맑은 창으로 새벽 해 들자 내 마음 재계하고]
정궤유편정아안(淨几遺編整我顔)[책상 정리하고 유편 펼치니 안색 정돈되네]
원사인간천만서(願謝人間千萬緖)[인간사 수많은 일들 모두 사양하고자 하니]
지요수습차신안(只要收拾此身安)[그저 이 한 몸 거두어들여 편안하여지고 싶네]
[특징]
「영영모당신성」은 2행에 ‘산(刪)’ 계열의 운목, 4행에 ‘한(寒)’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절구이다. 인운(隣韻)으로 통운(通韻)하였다.
[의의와 평가]
「영영모당신성」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손처눌이 1600년에 영모당을 새로이 짓고 지은 작품이다. 손처눌은 영모당을 중심으로 연경서원(硏經書院), 이천서원(梨泉書院), 선사재(仙査齋) 등에서 강학 활동을 펼치며, 대구 지역의 문풍(文風) 진흥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손처눌은 「영영모당신성」에서 남은 여생을 학문에 헌신하겠다는 의지를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