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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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廷彪 |
영어공식명칭 | Lee Jeong-pyo |
이칭/별칭 | 방부(方父)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호석 |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완주군 출신의 무신.
[가계]
이정표(李廷彪)[1562~?]의 자는 방부(方父),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순효(李順孝)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공적을 세운 이정란(李廷鸞)은 이정표와 8촌 간이다. 또한 『목산집(木山集)』의 저자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문신 이기경(李基敬)은 바로 그의 6대손이다.
[활동 사항]
이정표는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제143위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임진왜란 후인 1600년(선조 33) 정월에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임명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정월에는 김해부사(金海府使)에 임명되었다. 1604년(선조 37) 4월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정권을 장악하자 교동별장(喬桐別將), 동지중추부사, 공홍도병사(公洪道兵使), 강화별장, 강화부사(江華府使) 등을 지내는 등 순탄한 관직생활을 지냈다. 그러나 교동별장으로 재직 중 당시 그곳에 유배해왔던 임해군을 핍박해서 죽인 혐의로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고 삭탈관직되었다. 신흠(申欽)의 『상촌집(象村集)』에는 이정표에 대해서 “이정표는 무반(武班) 중에서도 가장 무뢰배(無賴輩)였다. 무신년과 계축년 사이에 임해군(臨海君)과 대군(大君)을 죽일 때 도와서 이로 인하여 뽑혀서 병사(兵使)에까지 올라갔고, 갑인년에 강화부사(江華府使)로 있을 때는 또 장사꾼을 시켜 수백 냥의 은(銀)을 바쳐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다. 그러나 진소(鎭所)에 가자마자 독한 병에 걸려 죽으니 그 장사꾼이 손해 보고 분이 나서 전주(全州)에 있는 본가(本家)로 가서 받았다 하니 이것이 그 한 가지 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이정표는 1604년(선조 37)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