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64
한자 李命俊
영어공식명칭 Lee Myeongjun
이칭/별칭 창기(昌期),잠와(潛窩),진사재(進思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감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72년연표보기 - 이명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이명준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13년 - 이명준 영덕 유배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이명준 대사간 제수
몰년 시기/일시 1630년연표보기 - 이명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44년 - 이명준 좌찬성 추증
유배|이배지 경상북도 영덕군
묘소|단소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전의
대표 관직 사간원 대사간

[정의]

조선 후기 영덕으로 유배 온 문신.

[가계]

이명준(李命俊)[1572~1630]의 본관은 전의(全義)로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 또는 진사재(進思齋)이다. 증조부는 이공달(李公達)[1464~1519]이고, 조부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지낸 이문성(李文誠)[1503~1575]이다. 아버지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를 지낸 이제신(李濟臣)[1536~1584]이며, 어머니는 목천상씨(木川尙氏)로 상붕남(尙鵬南)의 딸인데 상붕남은 영의정을 지낸 상진(尙震)[1493~1564]의 아들이다. 부인은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김찬조(金纘祖)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명준의 아버지였던 이제신은 조식(曺植)[1501~1572]의 문인이었으나 12살에 부친이 죽었기에 남명학(南溟學)을 직접적으로 사승(師承)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성혼(成渾)[1535~1598]·이정암(李廷馣)[1541~1600]·이항복(李恒福)[1556~1618]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특히 기호학(畿湖學) 중에서도 우계학을 계승하였다. 이명준은 1601년(선조 34)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3년(선조 36)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 이후 형조좌랑·병조정랑·서원현감(西原縣監)·평양서윤(平壤庶尹) 등을 지내는 등 순탄한 관직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1613년(광해군 5)에 발생한 '칠서의 옥[七庶之獄]'에 서제(庶弟)인 이경준(李耕俊)이 주범으로 연루되어 죽자 이명준도 연좌제의 율에 걸려 동년 6월 영덕으로 유배되는 형에 처해졌다.

이명준은 영덕에서 무려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이때 인근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이명준의 명성을 듣고 배우기 위해 적소(謫所)를 찾아왔다. 유배 시절에 형성된 문인들의 구체적인 명단은 확인되지는 않지만 충청도 출신의 제자인 조극선(趙克善)[1595~1658]의 일기를 통하여 영덕출신 인사들의 일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조극선이 영덕에 유배된 스승을 찾아 배문(拜門)을 한 시기는 1616년(광해군 8) 10월의 일로 유배된 지 3년이 지난 후였다. 이때는 이미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있던 시기였는데, 일기에도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즉, “···뜰 앞 초당이 학도들이 수업하는 곳인데··· 선생께서는 늘 복건(幅巾)을 쓰고 매일 문생들과 강론하는 것을 본무로 삼고 계셨다.”라고 하여 귀양처에서도 활발하게 문인들을 양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명준의 유배시절에 형성된 문인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대개 영덕지역 출신의 인사들과 함께 타 지역에서 배움을 청하러 온 문인들이였다. 영덕지역 출신인사 중 기록에서 확인되는 문생으로는 백흥윤(白興胤)·이종덕(李鍾德)·신명립(申命立)·신이상(申履常)·신종망(申宗望)·신이효(申以孝)[1602~1649]·남정(南侹) 등이 확인되고 타 지역 인사로는 김종일(金宗一)[1597~1675]·홍해룡(洪海龍) 등이 확인된다. 이 밖에도 제자양성 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 영해지역에 유배되었던 김시양(金時讓)[1581~1643]과도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서인 정권이 탄생하고 이명준이 복권되자 이를 경하하기 위하여 당년 5월 백흥윤을 중심으로 한 영덕문인들이 서울을 단체 방문하여 직접 축하 인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명준은 해배(解配)가 된 뒤에도 영덕문인들과의 사우관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명준이 유배 생활을 한 시점부터 영덕 지역은 퇴계학(退溪學)의 우세 속에서도 우계학을 전파하고 공유하는 데 그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이명준의 저서로는 1749년(영조 25) 후손 이징도(李徵道) 등이 유문을 모아서 간행한 『잠와유고(潛窩遺稿)』가 전한다.

[묘소]

이명준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명준은 1644년(인조 22)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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