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박씨의 집성촌 부천은 그리 규모가 큰 도시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지역이다. 비록 지금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그 수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민씨, 변씨, 신씨, 박씨 등이 오랫동안 부천에 세거하였다. 집성촌은 동일한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는 성씨들이 모여서 이룬 마을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정착, 형성 후 오랜...
연분홍 복사꽃이 피어나는 무릉도원 부천은 현재 심곡본동인 깊은구지와 송내동 지역을 중심으로 소사 복숭아밭이 중점적으로 형성되어 왔으며, 이곳에서 수확량의 대부분을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도 부천의 소사복숭아를 맛보기 위해 실제 산지인 송내동을 중심으로 복숭아 과수원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부천 전역이 모두 다 복숭아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물론 전...
“옛날 한국은행 화폐소각장이 지금의 송내 2동 사무소 앞에 있는 송내실내체육관 자리에 있었죠.” 한국조폐공사에 따르면 국내의 은행권은 100% 면으로 만들어져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은행권 생산은 수준 높은 기술이 요구되고 있는 첨단산업으로, 한국조폐공사는 선진적인 제조 기술을 인정받아 해외로 화폐를 만들어 수출까지 하고 있다....
“경인국도변 복숭아 좌판이 언제부터인가 하면 정확히는 몰라도 70년대 초부터 활성화가 됐던 걸로 기억해요.” 가난했던 1970년대. 학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던 풋과일은 여느 만찬에 못지않은 훌륭한 먹을거리였다. 특히 머리에 광주리를 인 아주머니가 산지 복숭아를 한 가득 담고 팔러 다니면 10원을 내고 열 개씩 사와서 우두둑 소리가 나게 씹었다. 이 시절을 살았던 부천 사람들에게...
“산 위에 올라가서 쥐불놀이도 하고 복숭아서리 하고 그런 것들은 저희 때는 흔해서 재미가 없었어요.” 뭐니뭐니 해도 복숭아의 매력은 서리를 해 먹는 재미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땅히 군것질거리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밭모서리 복숭아 나뭇가지에 먹음직스럽게 익어가는 복숭아를 보고 군침만 삼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채 익기도 전 풋내가 날 때부터 시작된 복숭아 서리는 한...
시인의 정서를 뒤흔드는 마을 서울하고 가까운 역곡역 언저리나 인천하고 가까운 송내역 언저리는 고속도로 너머의 북쪽 동네들과 마찬가지로 부천시의 중심지와는 약간 동떨어져 있으며 아직까지 시골냄새가 꽤 짙은 곳이다. 송내동 남쪽은 국도를 따라 부천시의 중심지에 닿아 있으나 북쪽 지역으로 갈수록 농촌의 모습을 띤다. 그런가하면 고속도로 너머의 동네들은 부천시에서 가...
“옛날에 우리 방범도 많이 돌았잖아요. 딱딱이 들고요. 옛날에는 그런 게 다 있었어요.” “마을에서 몇 사람씩 조를 짜서 나무로 딱딱딱 소리를 내면서 다녔어요. 그게 한 마디로 도둑을 방지하는 방법이었죠.”(박순규, 부천새마을금고 이사장, 1952년생) 송내동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어려울 때 하나 되는 주민들의 단합이었다. 특히 마을에 좀도둑이 자주 들자 젊은 주민들을...
“우리가 어려서 자라면서 피라니 산소라고 하나 있었어요. 굉장히 큰 능이 하나 있었어요.” 송내동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능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어려 자라면서 피라니 산소라고 하나 있었어요. 굉장히 큰 능이 하나 있었어요. 저 위에 피라미인지, 피라니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피라니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그게 없어졌는데 우리 어렸을 적에 굉장히 그게 커...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전에 구루마에 복숭아를 가지고 나오시는 분들은 묵인을 해줬어요.” 1946년 9월 미군정 포고령 제 1호에 따라 치안과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서울과 인천을 대상으로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것은 88올림픽 유치 직후였다. 밤 12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2인 1조 야경꾼들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면서 ‘통금’이라고 길게 소리쳤다. 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