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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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道郡誌一八七一年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병훈 |
간행 시기/일시 | 1871년 - 『청도 군지』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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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 한국학 문헌 연구소의 『한국 지리지 총서』[『읍지』 4-경상도 4]에 영인본 수록 |
소장처 | 서울 대학교 규장각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산56-1 |
성격 | 읍지 |
저자 | 청도군 |
편자 | 청도군 |
간행자 | 청도군 |
권책 | 1책 |
행자 | 10행 18자 |
규격 | 20.8㎝[가로]|31.2㎝[세로] |
권수제 | 청도 군지 |
[정의]
1871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 사업으로 청도군에서 편찬한 읍지.
[개설]
청도군의 읍지(邑誌)는 18세기[정조], 1832년, 1871년, 1895년, 1899년 등 다섯 차례에 걸쳐 제작되었다. 2013년 현재 이들 판본은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수장되고 있으며, 이 중 1832년, 1871년, 1895년 판본은 영인본으로 출간되었다.
18세기에 간행된 판본은 정확한 작성 연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호구수가 1786년의 병오식(丙午式)을 기재하고 있고, 전결·전세·대동 등은 1785년의 을사조(乙巳條)의 내역을 기록하고 있어서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여지도서(與地圖書)』[1757∼1765년 제작]의 「청도군 읍지(淸道郡邑誌)」와는 제언(堤堰) 조가 첨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구성이 비슷하다. 또한 1832년에 만들어진 읍지와도 비슷한 항목이 많지만 강계(疆界), 능침(陵寢), 단묘(壇廟), 물산(物産), 한전(旱田), 수전(水田), 조적(糶糴), 읍재(邑宰) 등의 항목은 이후 명칭이 변경되거나 비슷한 항목끼리 통합되었다. 이렇게 볼 때 18세기에 제작된 『청도군 읍지』는 『여지도서』와 『경상도 읍지』[1832년]의 중간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서 그 상한은 1786년으로 볼 수 있다.
1832년 이후 정부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읍지 편찬이 세 차례 더 진행되었고, 청도군 역시 이에 동일한 시기에 읍지를 제작하였다.
[저자]
1871년 청도군에서 간행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1871년(고종 8) 의정부에서 열읍 지도(列邑地圖)를 올려 보내라는 명령이 전국에 내려졌다. 이는 예전에 기록된 것 중에서 변경된 내용들을 수정 보완하려는 의도였다. 그리하여 우선 수정한 1부를 위로 보내고, 1부를 더 필사하여 각 군에 유치(留置)하였다. 현재 확인되는 『청도 군지(淸道郡誌)』는 1871년 당시 상송한 것으로 현재 서울 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서지]
『청도 군지』는 1871년에 간행된 『영남 읍지(嶺南邑誌)』 총 17책 중 16책에 수록되었다. 표제는 ‘영남 읍지 순흥·청도·영천(嶺南邑誌順興淸道永川)’이며, 내제는 ‘청도 군지’이다. 판본은 필사본이고, 편저자는 청도군이다. 본문 앞에는 ‘청도군 여지도(淸道郡輿地圖)’가 부분 채색(部分彩色)으로 그려져 있으며, 판본의 크기는 가로 20.8㎝, 세로 31.2㎝이다. 서책 사주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선인 광곽(匡郭)은 사주단변(四周單邊)이고, 행자수는 10행 18자, 주(註)는 쌍행(雙行)이다.
[구성/내용]
『영남 읍지』는 1871년 전국적인 읍지 편찬 사업으로 편찬 상송된 경상도의 각 읍지·역지(驛誌)·목장지(牧場誌)·진지(鎭誌)를 한데 모은 것으로 모두 17책으로 되어 있다. 이 중 『청도 군지』는 16책에 순흥·영천과 함께 실려 있다. 이외에도 제4책의 역지(驛誌)에는 청도 관할인 ‘성현역(省峴驛)’의 내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1871년의 『청도 군지』는 1832년에 제작된 『청도군 읍지』와 비교하여 대체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항목이 보다 세분화되어 이전보다 9항목이 많은 49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사례(事例)’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본문의 내용도 더 상세하며, 글자도 더 정갈하고 강조하는 부분은 크기를 달리하여 읽기 싶게 제작되었다.
수록된 항목은 총 49항목으로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읍지의 머리에는 채색 지도가 첨부되어 있는데,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하여 관아·향교·서원·산천·도로·봉수·역·사원 등이 간략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어서 청도의 건치 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관직(官職)·성씨(姓氏)·관기(官基)[공해(公廨)]·산천(山川)·풍속(風俗)·방리(坊里)·호구(戶口)·전부(田賦)·군액(軍額)·성지(城池)·임수(林藪)·군기(軍器)·창고(倉庫)·관액(關阨)·진보(鎭堡)·봉수(烽燧)·산성(山城)·학교(學校)·단묘(壇廟)·원사(院祠)·총묘(塚墓)·불우(佛宇)·누정(樓亭)·도로(道路)·교량(橋梁)·도서(島嶼)·제언(堤堰)·장시(場市)·역원(譯院)·목장(牧場)·형승(形勝)·고적(古蹟)·토산(土産)·진공(進貢)·봉름(俸廩)·환적(宦蹟)·과거(科擧)·인물(人物)·본조절효(本朝節孝)·효자(孝子)·효부(孝婦)·열녀(烈女)·생진(生進)·제영(題詠)·비문(碑文)[비판(碑板)]·책판(冊板)·사례(事例) 등으로 이루어져, 역사·지리·정치·경제·사회·문화·풍속·인물·시문 등 여러 방면에 대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항목에서 뒤쪽에 있던 공해(公廨)가 항목명을 관기로 달리하여 앞으로 이동되고, 인물조에 들어 있던 본조절효·효자·열녀조가 개별 항목으로 축출되면서, 효부와 생진의 항목도 신설되었다. 이외에 원사와 사례 항목도 신설되었다. 이처럼 인물과 원사, 관청과 관련된 항목의 신설과 이동은 19세기 말 관권의 강화, 원사의 건립, 절효·효자·효부·열녀·생진 등을 통한 가문 현양(顯揚)의 노력이 가속화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호구·전부의 경우 식년(式年) 표시가 없지만, 1871년 『영남 읍지』가 대체로 1870년[庚午]의 호구·시기(時起)을 따르고 있으므로, 청도군 역시 그러할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호구와 전부의 경우 1832년에 비하여 소폭이나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방증(傍證)한다. 또한 환적조는 1871년경 직전까지의 수령[박효헌(朴孝憲)]을 기재하고 있다. 이외에 성씨, 관방, 진보, 목장, 도서 등 대부분의 항목이 이전의 읍지와 동일한 것으로 보았을 때 1832년에 간행된 『청도군 읍지』를 저본(底本)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영남 읍지』[1871년]는 1832년의 『경상도 읍지』 내용을 전사(轉寫)한 것이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적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청도군의 경우 이전 읍지에서 볼 수 없었던 ‘사례’와 청도군에 있었던 ‘성현역’의 내용이 역지(驛誌)로 별도로 제작하여 첨부하고 있으며, 1870년[庚午式]에 새로 변경된 일부 항목에서 수정하여 기재하고 있다. 이처럼 1871년에 편찬된 『청도 군지』와 「성현역지」는 부분적이나마 청도군의 변화상을 담고 있기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