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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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戶籍拒否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일어난 유림의 호적 거부 운동.
[개설]
일제의 한국 병합 이후 자결 순국(自決殉國)과 일제의 통치에 대한 거부가 전국적으로 결행되었다. 청도 지역의 경우 자결 순국하거나 납세 거부, 은사금 거절 등으로 항거하고 있는 사례는 찾아 볼 수 없으나,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과 덕암(德岩) 김달(金達) 등의 보수적인 유림들이 호적 거부(戶籍拒否)를 통해 일제의 통치를 부인하는 경우가 있었다.
[역사적 배경]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 제국을 강점하자 민족 지사들은 나라의 멸망을 개탄하고, 일본 통치의 모든 것을 거부하였다. 한일 합병이란 큰 충격 속에서 민족 지사들은 섬나라 오랑캐의 지배 하에서 생존을 거부하고, 자결 순국의 적극적인 투쟁을 택하였다
한편 자결 순국은 결행하지 않았지만 작위(爵位)의 거절과 은사금(恩賜金)의 거부,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세금, 호구 조사, 전표(田標), 묘표(墓標) 등 모든 일제의 통치 행위를 부인했다. 또한 일본의 국경일 의식 참가 거부를 비롯하여 평생 상복으로 하늘을 보지 않고 죽은 유생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회유와 핍박은 70세 이상의 고령자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경과]
일제 강점기 청도 지역에서 일제의 식민 통치에 거부하여 호적을 거부한 보수적인 유림은 성기운과 김달이었다. 성기운은 일제 침략의 위기적 상황을 맞이하여 강상 의리(綱常義理)를 세우고 존양대의(尊攘大義)를 주장함으로써 선비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그는 ‘인간은 학문이 아니면 인간이 될 수 없다.’라고 하여, 학문은 곧 인간이 인간 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학문이란 도(道)를 배우는 것이며, 이 도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지켜야 할 윤리라 하여 실천성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성기운은 스승 간재가 현실 문제에 소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리(義理)를 실천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성기운은 41살이 되던 1917년 5월 24일 호적령(戶籍令)에 반대하여 호적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 성기운은 1917년 5월부터 8월까지 4차례에 걸쳐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고문에도 불구하고 단식으로 대응하며 일제의 호적에 등재되기를 거부였다. 뿐만 아니라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하여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거부하며 대한 유민(大韓遺民)을 자처해 일본 경찰도 감동하여 진의사(眞義士)로 평가하였다. 1956년 충남 공주의 달전 정사(達田精舍)에서 서거하였다.
김달은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호적령에 반대하여 호적을 거부하다가 청도 경찰서에 체포 수감되었으나 끝내 호적을 거부하였고, 석방 후 경산 마안산(馬鞍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그 후 향리로 귀향하여 용각산(龍角山) 아래 덕천의 용산정(龍山亭)에서 서당을 열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60년 3월 13일 서거하였다.
[의의와 평가]
성기운과 김달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고, 대한의 백성임을 천명하였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 구금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절의(節義)를 지키는 진정한 선비의 기개를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