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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964
한자 李浤
이칭/별칭 심원(深源),귀래정(歸來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40년연표보기 - 이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80년 - 이굉 식년 문과에 합격
활동 시기/일시 1499년 - 이굉 사재감 첨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00년 - 이굉 사헌부 집의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03년 - 이굉 상주 목사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04년 - 이굉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함
활동 시기/일시 1504년 - 이굉 영해로 귀양 감
활동 시기/일시 1506년 - 이굉 중종반정으로 사유됨
활동 시기/일시 1506년 - 이굉 첨지중추부사에 오름
활동 시기/일시 1507년 - 이굉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13년 - 이굉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513년 - 이굉 동지중추부사에서 사직됨
몰년 시기/일시 1516년연표보기 - 이굉 사망
거주|이주지 이굉 거주지 - 경상북도 안동시
묘소|단소 이굉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고성
대표 관직 개성 유수

[정의]

조선 전기에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부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 군위 현감을 시작으로 사간원 헌납·사헌부 지평·공조 정랑 등을 역임하며 탄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영해로 귀양가기도 하였으나 중종반정 때 해배되어 다시 관직에 기용되었다.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심원(深源), 호는 귀래정(歸來亭). 이굉은 고려 시중(侍中) 문정공(文貞公) 행촌 선생(杏村先生) 이암(李嵒)의 4대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봉익대부 밀직 부사 진현관 제학을 지낸 이강(李岡)이며, 할아버지는 좌의정 철성 부원군 이원(李原)이다. 아버지는 영산 현감을 지낸 이증(李增)이고, 어머니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이희(李暿)의 딸이다. 이희는 고려 후기 학자인 이제현의 후손으로서, 명망 있는 집안이었다. 부인은 송의(宋衣)의 딸 진천 송씨로, 딸 하나를 두었다.

[활동 상황]

이굉(李浤)[1440∼1516]은 1464년(세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다가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상복을 벗고 전적(典籍)이 된 뒤 군위 현감·세자시강원 문학·사간원 헌납·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얼마 뒤 공조 정랑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보임을 청원하여 청도 군수에 임명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 임기가 차서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이 되었고, 봉상시 부정(奉常寺副正) 등을 지냈다. 1500년(연산군 6)에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예빈시 정(禮賓寺正)·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로 자리를 옮겼다.

1503년(연산군 9)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504년 갑자사화김굉필(金宏弼)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었다. 중종반정(1506년) 뒤 다시 기용되어 병조 참의·충청도 병마절도사·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했고, 1513년(중종 8)에 나이가 많아 사직했다.

갑자사화 이후 이굉의 조카 이육(李育)이 청도 유등으로 이주하여, 고성 이씨 청도 입향조가 되었다.

[학문과 저술]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안동에 낙향하여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 생활을 즐겼다. 시문에 능하였다.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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