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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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更生 |
이칭/별칭 | 숙향(叔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이경생은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광해군이 인목 대비를 폐하려 하자 반대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으나, 임금 될 사람을 가까이 하면 은혜를 구하는 삶이 될까 조심하였다. 1623년(인조 1) 김화 현감을 시작으로 풍덕 군수·양양 부사·청도 군수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숙향(叔向). 아버지는 승지에 추증된 이유(李綏)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판관 민철명(閔哲命)의 딸이다.
[활동 상황]
이경생(李更生)[1585∼1646]은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고, 친구를 신의로 사귀었으며 남이 급할 때 도와주기를 좋아하였다. 젊어서 청운군 심명세(沈命世)와 친했는데, 어느 날 심명세가 반정 계획을 털어놓자, 능양군(陵陽君)[뒷날의 인조]을 한번 만나보고는 다시는 모의에 가지 않았다. 장차 임금이 될 사람을 가까이 하면 은혜를 구하는 삶이 될까 조심했던 것이다. 반정이 성공하여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광릉의 민가에 숨어 버렸다. 인조가 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으나 사양해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르지 못했다. 광해군 때에도 인목 대비를 폐위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홍무적(洪茂積)과 함께 폐비 불가를 극간하였고 이원익(李元翼)을 죄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623년에 김화 현감이 되고 이듬해에 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이 되었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는 공주까지 어가(御駕)를 호위하며 따라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이서(李曙)의 종사관으로 군병을 모집하였고, 1632년(인조 10)에 풍덕 군수에 이어 한성 서윤·양양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공조 정랑을 거쳐 1636년(인조 14) 3월에 청도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1638년(인조 16)에 군병을 정밀하게 뽑고 포(砲)와 화살을 많이 갖추어 놓아 임금에게 표리(表裏) 1벌을 하사받았다. 재임 중 객관(客館)을 새로 건립하는 공을 세웠으며, 1641년(인조 19) 5월에 퇴임했다. 이후 인천 부사·나주 목사를 지냈다.
[학문과 저술]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상훈과 추모]
임지였던 청도에 선정비가 세워졌으나, 현재 청도 도주관에는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