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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리[인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978
한자 徐元履
이칭/별칭 덕기(德基),화곡(華谷),견지(見志)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홍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6년연표보기 - 서원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7년 - 서원리 진사시, 생원시에 합격
활동 시기/일시 1631년 - 서원리 세자익위사 세마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3년 - 서원리 사헌부 탄핵으로 삭탈 관직
활동 시기/일시 1647년연표보기 - 서원리 청도 군수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1년 - 서원리 천안 군수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6년 - 서원리 경상도 관찰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658년 - 서원리 강화 유수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59년 - 서원리 동지중추부사 겸 총관이 됨
활동 시기/일시 1661년 - 서원리 호조 참판과 비변사 당상을 겸함
활동 시기/일시 1662년 - 서원리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63년연표보기 - 서원리 함흥부에서 사망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대구
대표 관직 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 청도 군수를 지낸 문신.

[개설]

서원리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봉림 대군의 사부로서 심양까지 따라가 봉림 대군을 모셔 신임을 얻었다. 현종이 세자 시절 춘궁 강관을 뽑을 때에도 진선으로 발탁되어 국왕과의 인연이 깊었다. 강원도·경상도·함경도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였고 강화 유수로 재임할 때는 병기 수보(修補)와 군량미 확보에 노력하여 효종의 북벌 계획을 도왔다.

[가계]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덕기(德基), 호는 견지(見志)·화곡(華谷). 할아버지 서성(徐渻)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는 우의정 서경우(徐景雨)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成恬)의 딸이다.

[활동 상황]

서원리(徐元履)[1596∼1663]는 광해군 때 집안에서 화를 당하자, 들어앉아 글만 읽었다. 그 덕분에 1627년(인조 5) 연달아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다. 1631년(인조 9)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에 제수되어 3년 만에 부솔(副率)에까지 올랐으며, 얼마 후에는 봉림 대군[뒷날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 봉림 대군이 볼모로 심양(瀋陽)에 가던 길을 시종하다 마음대로 돌아왔다 하여 청풍(淸風)에 잠시 유배되었고, 다시 심양에 가서 봉림 대군을 모시며 신임을 얻었다. 조선으로 돌아와 공조 좌랑을 거쳐 3년 뒤에는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1643년 면포 수봉(收捧)과 관련하여 사헌부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1647년(인조 25)에 청도 군수로 나갔는데 3년 동안을 법을 잘 지켜 굽힘이 없었다. 1651년(효종 2) 천안 군수에 임명되어 대동법을 시행할 때 경비의 운용을 알맞게 하고 부역을 너그럽게 하여 높은 치적을 쌓았다.

그 후 세자(世子)[뒷날의 현종]의 춘궁 강관(春宮講官)을 뽑을 때 진선(進善)에 발탁되었고, 이어 장령·집의·승지·공조 참의·호조 참의를 역임한 후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조정에 돌아와 승지와 형조 참의를 거쳐, 1656년(효종 7)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군정(軍政)을 잘 닦았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승지로 옮겼다.

1658년(효종 9) 강화 유수가 되어 병기 수보(修補)와 군량미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고, 직장목(直長木)을 포구에 묻어 두어 유사시에 목책(木栅)을 세우는 재원으로 삼는 등 효종의 북벌 계획을 도왔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동지중추부사 겸 총관(同知中樞府事兼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 우윤을 거쳐 1661년(현종 2) 원두표(元斗杓)의 추천에 의하여 호조 참판과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가을 주가(主家)[공주 또는 옹주의 궁방]에서 토지를 개간하고 겸병한 일의 진상을 조사하고는 민전의 궁가 흡수를 반대하다가 잠시 파직되었다. 그 해 겨울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임지로 갔는데, 이듬해인 1663년(현종 4) 병에 걸려 4월 23일 함흥부의 관사에서 죽었다.

[묘소]

1663년 7월에 영평현(永平縣)의 선영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1666년(현종 7) 2월 후부인의 묘소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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