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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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融 |
이칭/별칭 | 유명,우당,유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 청도 지역의 문신.
[개설]
박융은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전한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그 사이 두 번의 면직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다시 서용되어 성균관 사예(司藝) 등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쳤다. 이후 함안 군수로 파견되어 목민에 힘쓰다가 1428년(세종 10)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명(惟明)[『국조방목』에는 유인(惟仁)], 호는 우당(憂堂). 송은(松隱) 박익(朴翊)과 박충민(朴忠敏)의 딸 창원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부인은 아산 장씨이며,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 박건(朴乾)이 밀양 박씨 청도 입향조이다.
[활동 사항]
박융(朴融)[?∼1428]은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문과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태종 11)에는 정언(正言)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 처분을 받았는데 박융도 사간 정전(鄭悛)·헌납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형조 좌랑·이조 좌랑 등을 거쳐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태종 18)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다시 서용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도·황해도·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 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빈민이나 이재민의 구제] 상황 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그는 이조 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이듬해인 1424년(세종 6) 무렵 경상도 도사로 재직할 당시에는 권근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반질하여 교육 진흥에 힘쓰는 한편 청도 향교를 중수하는 데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425년(세종 7) 성균관 사예(司藝) 등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함안 군수로 파견되어 목민에 힘쓰다가 1428년(세종 10)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이 있다. 『우당집』은 3권 1책으로, 1875년(고종 12) 후손 성묵(星默) 등이 편집·간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실전되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신계 서원(新溪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