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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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重修淸道學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동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64년 - 김일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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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498년 - 김일손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486년 5월 - 「중수청도학기」 저술 |
배경 지역 | 청도 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48 |
성격 | 기문 |
작가 | 김일손 |
[정의]
[개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1486년(성종 17)에 청도군학(淸道郡學)으로 있었다. 당시 청도 군수이던 이균(李鈞)이 김일손의 문학이 고명하고 언행이 엄정함을 알고 여러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사(學師)로 초빙하였다. 1486년 5월에 향교가 중수됨에 이균이 요청하여 김일손이 중수기를 썼다.
[구성]
「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의 구성은 향교를 중수하게 된 배경, 향교를 중수한 군수에 대한 축원, 생도들에 대한 당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
「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의 첫 번째 단락은 향교가 어떠한 장소인지를 설명하고 청도 향교의 현황에 대해 언급한다. “학교란 풍속과 교화에 있어 중요한 곳이니 향사(鄕射)를 행하고 양로(養老)하는 시설이 모두 여기에 있다.”라고 한 것처럼 향교가 성리학 이념 교육을 위한 주요한 기구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향교가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으므로 중수를 하게 되었고, 허물어야 할 절과 절을 짓기 위해 새로 구운 기와를 사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은 낙성식(落成式) 때 향교 중수에 대한 공을 군수인 이균(李勻)에게 돌리면서 축원하는 부분이다. 청도 향교의 중수가 지니는 의미는 김일손이 지적한 바와 같이 “척이단 부오도(斥異端 扶吾道)”, 바로 이단[불교]을 배척하고, 오도[유학]를 돕는 것임을 밝히고, 조선 건국 당시 향교 건물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경상도 도사였던 박융(朴融)[?∼1424]과 군수 이실(李實)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생도들에게 향교를 개축하였으니 부지런히 선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할 것과 붓을 놀려 이익과 영달만을 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특징]
기문은 대개 서사(敍事)와 의론(議論)이 합쳐지지만 「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의 경우 의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의의와 평가]
「중수청도학기(重修淸道學記)」는 김일손이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出仕)하기 전에 지은 글이다. 하지만 후일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수립하고 향촌을 교화하기 위해 김일손이 내세운 일련의 사회 정치 개혁안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성리학적 지배 이념의 확산과 관련하여 청도의 재지 사족층 형성에 향교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