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11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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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永厚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구희진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김영후는 1919년 3월 5일 영명 중학교[현 군산 제일 중·고등학교] 재학중 같은 학교 교사 이두열, 박연세 등이 주동한 1919년 3월 6일 군산 장날 독립 만세 거사 계획에 참가하였고 1919년 3월 5일 다수 학생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여 시내 각처에서 독립 선언서를 살포하며 독립 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활동 사항]
김영후는 1919년 3월 5일 당시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현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에 있는 영명 중학교[현 군산 제일 중·고등 학교] 학생으로, 같은 학교 교사인 이두열·박연세 등이 주도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학교 내에서 약 7천매의 독립 선언서를 복사하는 등 준비를 하였으나 주동 인물들이 사전에 검거되고 말았다. 김영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양기철·전세종 등 여러 학생들과 장날인 3월 6일 태극기를 흔들며 군산 시내로 시위 행진을 펼쳤으며 합세한 주민 500여 명과 함께 군산 경찰서 등 시내 각처에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김영후는 1919년 3월 31일 광주 지방 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고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영후의 공을 기리어 199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