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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노농협성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85
한자 公州勞農協成會
영어음역 Gongju Nononghyeopseonghoe
이칭/별칭 공주노동협성회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주외면|신하면(현 신풍면)|우성면|장기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족운동 단체
설립연도/일시 1927년연표보기
설립자 황원숙

[정의]

1920년대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있었던 항일·농민 단체.

[개설]

공주노농협성회와 지부의 설립은 소작인과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조직하고 저항하여 생존권 확보를 위해 투쟁하였던 민족운동이다.

[설립목적]

1920년대 농민조합운동이 합법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소작상조, 노동공제, 무산교육, 애경상문’ 등의 목적으로 농민들을 중심으로 노동협성회가 조직되었다.

[변천]

1925년 8월 『조선일보』 공주지국장 한원교 등이 ‘소작상조, 산업장려, 근검저축, 상호친목’의 4대 강령을 목적으로 한 노동협성회 「발기취지문」을 작성하여 각 면에 배포하고 각 면의 집행위원급 인물과 창립 회원 약 500명 정도를 규합하고자 하였으나 추진되지 못하였다.

1926년 1월 공주 읍내에서 유정현, 임창수, 이범규, 유덕영, 김철현 등의 발기인들은 ‘실업 장려를 통한 생활 향상 발전, 소작상조, 노동공제, 무산교육, 애경상조 등을 실행한다’, ‘조직 확대를 위해 각 면에 준비위원을 파견한다’는 등의 내용을 결정하였다.

주외면·탄천면·목동면에 김현구, 우성면·사곡면에 이억, 장기면·반포면·계룡면에 문봉의, 의당면·정안면에 조중환, 신상면·신하면에 윤홍중, 공주면에 신경순 등을 준비위원으로 선임하였다. 이어 3월에 공산성영은사에서 개최하려던 창립총회는 공주경찰서의 ‘집회 불허 방침’에 의해 무기한 연기되었다.

1927년 주외면 화은리 소작인들은 황원숙을 대표로 하고 군 및 경찰서에 ‘지주들의 무리한 도조수봉에 견디지 못하고 향토에서 생활할 도리가 없다’는 진정서를 제출한 뒤 전풍식의 집에서 ‘노농회’ 결성을 발기하였다. 주민들은 ‘소작상조, 무산자 교육, 노동공제’ 등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창립 준비 위원으로 김두홍·오봉근·전은봉·전정식·오세만 등을 선임하여 3월 5일 화은리 앞산에서 500~600여 명 농민들이 모여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창립대회에서 문봉의의 사회로 ‘지주의 소작인 착취’를 격렬히 비판한 황원숙의 연설이 있었고 이어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소작상조, 노동공제, 무산교육, 애경상문’ 등을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또한 단체의 명칭에서 ‘노농’을 문제 삼는 경찰 때문에 ‘노동협성회’로 개칭하였다.

주외면의 ‘노동협성회’ 창립을 계기로 군 단위 노동협성회 조직을 추진하였던 인사들은 계룡면, 장기면, 우성면, 신하면 등에 면 단위의 지부 결성을 추진하였다. 계룡면은 4월에 ‘1구에 회원이 100명이 넘으면 지부를 설치한다’는 지부 설립의 원칙에 따라 기산리 오천환의 집에서 100여 명의 농민이 모여 ‘기산지부’를 결성하고 야학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장기면은 5월에 문봉의의 노력으로 송원리 이덕영의 집에서 지부 설립 대회를 개최하여 소작부 위원 임인철 외 2인, 노동부 위원 임병구 외 4인, 교육부 위원 이원하 외 2인, 애경부 위원 이하병 외 3인을 선임하였다. 이후 송원리 주민들은 지역 유지를 설득하여 3곳에 야학을 설치하고 이성호·현창학·유명호·백남문·유종호 등은 강사로 활동하였다.

신하면(현 신풍면)은 10월 31일 정동익·김학수·엄익방 등의 주도로 대룡리에서 ‘농촌청년회’를 발기하고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고 회원 모집과 우의 단체에 협조를 구하는 등 창립 준비를 추진하였다. 우성면은 수리 공사로 인한 노동자 문제로 고민하던 유용노·조팔용·맹일형 등이 12월에 지부를 결성하기로 하고 한태원·정계진·김현억·김형원·오이상 외 3인을 설립준비위원으로 하여 문봉의의 사회로 동대리에서 설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설립 대회에서 ‘지부 위치, 소작상조, 노동공제, 무산자 교육, 애경상문, 회비, 열회 개최’에 관한 건 등을 결의하였다.

조직으로 노동부 한태원 외 3인, 소작부 권중덕 외 3인, 무산교육부 박화진 외 3인, 애경부 김형원 외 3인, 사교부 오이상 외 3인을 선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민족적 탄압이 자행되던 시기였던 당시, 경찰들은 모든 단체의 집회를 불허하고 수상한 언행을 하면 불법적 강제 연행과 수사를 감행하였으므로 공주노농협성회와 각 면 단위 지부들은 발기인 대회와 창립 대회 및 조직 결성 이후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거공주노동협성회와 지부의 구체적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나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단체를 결성한 경험은 이후 1930년대 농민들의 대표적인 민족운동인 공주 지역의 소작쟁의를 조직적으로 전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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