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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수리조합설립반대농민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95
한자 牛城水利組合設立反對農民運動
영어의미역 Agrarian Movement against Useong Irrigation Associ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반송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농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26년 10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28년 5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방문리
관련인물/단체 오윤근|오길상|김영상|이철재|주대중|서겸순 등

[정의]

1920년대 일제의 수리 시설 확충에 반대하여 공주 지역 우성면에서 일어난 농민운동.

[개설]

우성면민들은 일제에 의한 우성수리조합의 설립을 반대하여 조합 설립의 부당성을 진정하고 도지사·군수와의 면담을 요청하는 시위를 전개하는 한편 공사 저지 투쟁까지 전개하였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식민지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우성수리조합 설립 반대 투쟁은 농민민족운동의 한 양상으로 평가된다.

[역사적 배경]

일제는 조선을 식량 기지화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1920~1934)의 일환으로 토지 개량과 농사 개량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특히 수리 시설 확충, 개간·간척, 지목 변경 등의 토지 개량 작업을 추진하였다. 수리 시설 확충을 위해서 1920년대 중반 경부터 전국의 하천변 토지에 수리조합 설치를 본격적으로 실행하면서 지역마다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발단]

1926년 7월 홍수로 동천보(현재 통천보)가 무너져 제방 축조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조합 설립 문제가 대두되었다. 본격적 투쟁은 10월에 우성면 방문리 일본인 지주 아카시 하지메[赤司良一] 등이 수리 시설 설치를 위한 측량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동천보를 이용하던 우량답의 주인들은 우성수리조합 설립에 반대하였다.

국고 지원이 있었지만 지역 지주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많았고, 옥토를 소유하고 경작하던 지주와 소작인도 상당한 액수의 수세를 납부했으며 수리 시설의 확대로 일본인 소유의 황무지는 옥토로 바뀐 반면에 조선인들의 문전옥답이 물에 잠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과]

이듬해인 1927년 2월 동대리 오덕현의 집에서 100여 명의 지주들이 모여 수리조합 설치 전에 방축 공사부터 하자는 취지의 결의를 하고 오윤근·오길상 등 9인을 진정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우성수리조합 설립 반대의 이유로는, 투자에 비해 수익이 많지 않다는 점, 몽리구역 토지가 대체로 우량답이라는 점, 금강이 범람하면 몽리구역 이외의 토지와 가옥 피해가 더 커질 것이라는 점 등을 제시하였다.

일간지에서도 반대운동 관련 기사와 함께 ‘일개 일본인 지주의 의견에 부합’하여 군 당국이 지주들을 강제로 명령에 복종하게 한 것이라고 보도하여 반일 감정을 자극하였다. 3월부터 진정으로는 효과가 없음을 확인한 오유근·오길상·김영상·이철재·주대중·서겸순 등의 지주들은 군청과 도청 및 총독부 식산국에 진정위원을 파견하여 부당성을 알리고 수백 명의 면민을 이끌고 공주 읍내까지 진출하여 도지사·군수와의 면담을 요청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공사장에 파견된 순사들은 공사를 방해하던 한판봉과 권용준을 구타하고 시위 선동자를 조사한다는 이유로 공사 저지 투쟁에 앞장 선 최광필·박도삼·김치영·김춘길·김일선 등을 검거하였다.

[결과]

우성수리조합은 1927년 9월 인가를 얻어 1928년 5월에 설립되었다. 김갑순은 수리조합 설립에 반대하였으나 조합이 설립되자 태도를 바꾸어 조합장직을 맡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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