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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식당 이붕선 사장의 인생살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D040201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홍제연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상으로]

갑사 입구의 주차장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민박촌, 동쪽에는 식당가가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1968년에 계룡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진 결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나 공주시가 주도적으로 이 개발사업을 진행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상가 사람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현 한양식당의 이붕선씨는 당시 상가번영회를 이끌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음을 자부한다.

이붕선씨는 현재 67세로, 황해도 해주에서 다섯 살 어린 나이에 해방을 목격했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이 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불같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며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연평도로 들어갔다. 이붕선씨는 연평도에서 초중등학교를 마치고, 어려운 형편에 진학을 포기한 채 연평도 어업협동조합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 부친이 돌아가시자 연평도에서 상을 치르고 유택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0년 후인 1962년에 어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인천에서는 수협 경기도지부 연평어협출장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고등교육과정에 등록하였지만 결국 중단하고 훗날 1980년에 대구의 동양대학 한의학과(통신대학의 모체) 2년과정을 수료하며 한의학을 배웠다.

[평생의 인연을 만난 공주]

젊은 시절엔 처녀들이 줄줄이 따르기도 했지만, 왠지 도시물을 먹은 여자들이 거북했다. 그러다 스물아홉 남들이 노총각이라 놀릴만한 나이가 되었을 즈음 어디엔가 정착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어린시절 할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나면 계룡산으로 피하거라.” 그렇다면 계룡산이 있는 공주는 어디인가. 당시에 개명된 도시라고 할 정도로 지방 치고 교육열이 높은 곳이었다. 게다가 이모님이 살고 있던 동네였기에 이런저런 고민 끝에 1966년 충남 공주군으로 내려갔다. 가족을 반갑게 맞아준 이모들은 너도 결혼을 해야하지 않겠냐며 처녀를 소개시켜주겠노라 약속을 했다.

드디어 선을 보는 날. 앞에 앉은 규수는 뜻밖에도 중도농경신보 기자생활중에 몇차례 만나 낯익은 사람이 아닌가. 처음 들어본 목소리는 참으로 맑았다. 나이 스물여섯이면 만만치 않은 노처녀이건만, 그 당당한 태도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농촌 4H활동이 한창이던 시절 그 조직에서 홍보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마음을 떠볼 작정으로,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가 공주에서 살아볼까 하는데, 당장 직장도 없는 나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껏 선 자리에서 본 여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당장 당황을 하며 어쩔줄을 몰라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럼 같이 벌고 같이 고생하면 되죠” 그림같이 활짝 웃는 모습이 참 예쁘게 보였다.

일찍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집안의 전통에 따라 신부감은 결혼 6개월전부터 성당에 다니며 천주교교리 교육 후 영세를 받고 드디어 공주 중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스물아홉 노총각과 노처녀가 결혼한다며 공주시내에 소문이 파다했고, 성당 주변은 구경 온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이날 택시 석대를 빌려 친구들이 나눠 타고 함께 여행을 떠났다. 1968년에 큰 딸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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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붕선 씨 결혼 사진

[지방 주재기자생활]

결혼을 하고, 이모들의 도움으로 산성동에 집을 구해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서너달 쯤 아무일도 안하고 버텼더니, 어떤 분은 걱정을 하며 산성동사무소의 임시직을 권하기도 했다. 당시 월급이 25000원. 쌀 한가마가 5000원 하던 때였으니, 박봉이었다. 그렇게 살기는 싫었다. 그러다 중앙일보에서 지방주재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공주지국에 이력서를 넣었다.

서울에서 직접 필기시험과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예전 직장에서 글 잘하고, 글씨 잘 쓰기로 유명했던 그였다. 실기시험을 좋은 점수로 통과하고, 면접도 무난하게 합격. 중앙일보 지방 주재기자 생활이 시작됐다. 월급이 많지 않았지만, 적성에 맞았고 공주시에서 큰소리치며 살았다. 10년을 계획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3년쯤 지나면서 점점 회의가 밀려왔다. 그때엔 경찰이나 기자를 보면 앞에서는 굽신거려도 뒤에서 손가락질하던 때였다. 무엇보다도 자식들이 기자의 아들딸이란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싫어 당장 사표를 쓰고, 큰 도시인 대전으로 떠났다.

[계룡산 갑사로 들어가다.]

아들 둘과 딸 셋을 두고, 그야말로 다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았다. 대전에서는 비닐장판과 벽지 등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고 한동안 사업은 잘 풀렸다. 그러나 1969년 부도수표를 처리하지 못해 전 재산을 잃고 말았다. 요즘처럼 은행 추심이 빨리 되기만 했어도 그런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시절이었다.

마흔살. 남자 나이 한창때가 아닌가. 모든 것을 잃고 인생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하자, 한 친구가 그에게 계룡산에 들어가 마음을 추스러 보라 일러줬고, 재기의 심정으로 가족들과 계룡산 갑사로 찾아왔다. 각 암자마다 대처승이 있던 때라 그도 승려가 되어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갑사 한구석에 살림을 풀고, 닭, 오리, 염소를 키워 생계를 유지했다. 돈이 좀 모이자 소를 샀고, 소를 길러 모은 돈으로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렸다. 구멍가게에 ‘한양상회’라는 간판을 걸었다. 갑사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그럭저럭 장사가 되었다. 이 무렵의 경험담을 수기로 써서 1980년에 농업협동조합중앙회로부터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68년 계룡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자 갑사 주변에 있던 상점과 여관들은 모두 철거되고 산 아래 주차장이었던 자리에 조성된 상가부지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당장 건물을 지을 자금이 없던 이들은 고리사채를 끌어다 써가며 겨우 가게를 짓고 입주하였다. 상가 입주 권리는 기존에 갑사 주변에서 장사를 하던 기존 상인에게만 주어졌고, 지정된 업종에 따라 식당, 기념품점, 잡화상 등으로 나뉘어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은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때 고생한 일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려운 과정에서 ‘상가번영회’를 재편성하고 활성화에 힘써 오늘날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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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붕선 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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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괴목제 유사 이붕선 씨

60년대 후반부터 갑사를 찾아오는 학생 수학여행단체가 크게 늘어나 그 시절 하루에 10만원을 버는 날도 많았다. 덕분에 빚도 갚고, 아이들도 무난히 길러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큰 손님이었던 갑사 수학여행단은 급격하게 감소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한양상회 뿐아니라 기념품 가게들은 식당으로 업종을 전환하기 위해 시청에 민원을 제기하고 여러모로 애를 썼다. 기존 업자들에게 동의서를 받는 과정에서 갈등도 있었고, 화장실, 식수문제 등을 모두 해결하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1995년 허가를 받아 요식업을 시작했다.

1997년 IMF외환위기는 상가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을 기점으로 손님은 거의 늘지 않은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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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식당

[내 고향은 세군데]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황해도 해주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아버지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모습만 떠오를 뿐이지만, 그래도 출생지라는 인연에 황해도민회 공주시지부 총무 일을 하고 있다. 마음속으로는 다섯살부터 살았던 연평도가 고향이려니 하고 살았다. 그곳에서 살아온 친구들과 옛동네야말로 그를 이끌어주는 힘이다. 얼마전에는 공주에 왔던 연평도향후회 후배들에게 크게 대접을 하기도 했다.

해주와 연평도가 마음의 고향이라면 공주는 또 다른 고향이다. 공주에서 젊음을 바쳤고 아내를 만났으며 자식들이 태어난 곳이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공간이 아닌가. 어떤이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뽑는게 아니냐며 아직도 외지사람 취급을 하지만 마을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깊다.

갑사 입구에서 장사를 하면서, 갑사의 신도와 관광객 등산객 들을 볼때마다 이들에게 계룡산갑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언제부턴가 중장리계룡산, 갑사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직접 집필을 시작해 꽤 많은 분량의 원고를 완성했다. 책으로 인쇄를 할 계획이지만 자금이 부족해 차일피일 미룬 것이 벌써 몇 년째이다.

[고향 사랑을 인정받다]

한양식당에 들어서면 눈에 띄는 병풍이 하나 있다. 이붕선 사장이 평생 받은 상장과 상패를 복사하여 붙여둔 것인데 하나하나 살펴보면 상장을 발급한 기관이 참으로 다양하다. 자연보호 감시관에 위촉되어 활동하다 자연보호 공주시군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내기도 했고, 그 결과 국무총리의 표창 및 내무부장관상을 받았다. 이때 자연보호활동 수기가 우수상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충청남도지사와 공주군수·시장 및 농협조합장 등으로부터 수여된 각종 표창장이 한가득이다. 1988년에 충청남도 도정모니터로 위촉된 이후 지금까지 도청의 각종 사업을 주목하고 있는데, 그 중에 치안행정모니터의 활동도 했다. 뿐만아니라 계룡면개발위원장에 임명되어 하루하루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주업인 식당 경영을 제쳐두고 온갖 봉사활동을 하다보니 때로는 후회도 되지만 표창장들을 통해 지난 일을 인정받는 듯 하여 한편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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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식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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