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17
한자 士族
이칭/별칭 사인(士人),사류(士類),사대부(士大夫),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조선
집필자 장현희

[정의]

조선시대 시흥 지역의 문벌이 높은 집안 또는 그 자손.

[개설]

지금의 시흥시는 조선시대 인천부안산군에 속해 있었는데, 전통적으로 왕도의 직할지로서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유력 정치 세력의 재향(在鄕) 기반이기도 하였다. 경기 지역의 사족(士族)들은 향촌에 세거의 터전을 마련하여 거주하다가 관직으로 현달(顯達)하면 생활 기반을 한양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도 향촌에 존재한 그들의 선영(先塋) 등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전답을 운영하며 문중 활동을 통해 족세를 유지해 갔다. 조선시대 시흥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은 안산 김씨(安山金氏), 진주 강씨(晉州姜氏), 진양 하씨(晉陽河氏), 창녕 성씨(昌寧成氏), 문화 류씨(文化柳氏), 청주 한씨(淸州韓氏), 안동 권씨(安東權氏), 덕수 장씨(德水張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파평 윤씨(坡平尹氏) 등을 들 수 있다.

[연원]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유학자 또는 유학을 수학한 관료는 유사(儒士)·유신(儒臣)으로 불렸으며 고려 말기에 신유학(新儒學)이 들어오면서 사대부(士大夫)·사인(士人)·사류(士類)·사족(士族)이란 호칭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사족은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로서 사대부가 될 수 있는 족속을 말한다. 사대부는 때로는 문관 관료뿐 아니라 문무 양반 관료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쓰였으며 일반적으로는 양반 신분층을 지칭한다.

[15세기 사족의 동향]

1454년(단종 2)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시흥 지역의 성씨로 인천부에 이(李)·공(貢)·하(河)·채(蔡)·전(全)·문(門)의 토착 성씨가 있었고, 내성(來姓)으로 박(朴)씨가 있었으며 망성(亡姓)으로 최(崔)씨가 있었다. 안산군에는 김(金)·안(安)·방(方)의 토착 성씨와 망성으로 임(林)씨가 있었다. 이 같은 토성 구성은 16세기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까지 그대로 계승되었다.

오늘날 시흥 지역과 관련이 있는 토성의 경우 안산의 안산 김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씨는 조선 초기의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이족(吏族)으로 전락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시흥 지역의 주요 세거 사족으로는 안산의 토착 성씨인 안산 김씨와 토성이 아니면서 시흥 지역으로 이거(移居)하여 정착한 진주 강씨진양 하씨를 들 수 있다.

안산의 토성이던 안산 김씨는 13세기 후반에 출사한 김위(金渭)를 1세대로 하는 가문으로 그의 증손인 김정경(金定卿)[1345~1419] 때 와서 훈척 가문(勳戚家門)으로 성장하였다. 고려 후기 세족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안산 김씨는 조선의 건국에 협조함으로써 여말선초의 격변기에도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토성이 아니면서 시흥 지역으로 이거하여 정착한 가문으로는 진주 강씨가 있다. 진산부원군 강계용(姜啓庸)이 가문의 시조이며 고려 말에 경상도를 지역 기반으로 하다가 조선 초기 관직에 진출하면서 경기도 일대에 세거지를 마련하였다. 진주 강씨의 현조(顯祖)는 강회백(姜淮伯)[1357~1402]으로 강석덕(姜碩德)[1395~1459], 강맹경(姜孟卿)[1410~1461],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1424~1483], 강구손(姜龜孫) 등 그의 자손들은 관직으로 현달하였다. 태종 대의 유력 가문과 세조 대 훈구(勳舊)의 정점에 있었던 여러 정치 세력과 혼인을 맺으며 중앙 훈구계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강순덕(姜順德)의 처부였던 이숙번(李叔蕃)[1373~1440]이 안산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았는데, 당시 균분 상속의 관행에 따라 처가의 재산을 강순덕이 분급받아 시흥 일대에 진주 강씨의 지역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거 성씨로는 진양 하씨가 있다. 진주의 토성이었던 진양 하씨는 고려 말 중앙에 진출하여 조선에 들어와 경기도 일대에 자리 잡게 되었다. 시흥 지역의 입향조인 하연(河演)[1376~1453]은 세종 때 대사헌으로서 불교 사찰의 혁파를 주도하였고, 연분9등(年分九等)과 전분6등(田分六等)을 내용으로 하는 공세법(貢稅法)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하연이 죽자 후손들은 묘소를 소래산에 마련하였으며, 이후 이곳에 세거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영당(影堂)이 불타버리자 하연의 영정을 고향인 경상도 합천으로 옮기고 채진당(采眞堂)이란 영당을 건립하였다. 이를 계기로 소래산 일대는 진양 하씨들에게 한때의 우거처(寓居處)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6세기 사족의 동향]

16세기 들어 사림 세력이 점차 중앙 정계에 진출하던 정치적 상황은 시흥 지역 사족의 판도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훈구적 성향을 보이던 안산 김씨는 정치적으로 위축되어 갔으며 진주 강씨의 경우 시대 변화에 부응하며 사림의 성향으로 변화되어 갔다. 그 밖에 16세기 시흥 지역에서 주목되는 가문이 창녕 성씨이다.

창녕 성씨는 창녕과 양주, 장단 일대를 기반으로 하다가 15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소래산 인근에 정착하였다. 시흥 지역의 입향조는 호조좌랑 성완(成玩)[1436~1500]이다. 그의 형제 성찬(成瓚)의 아들인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연산군 때 박원종(朴元宗)·류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옹립, 중종반정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봉되었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6세기 이래 창녕 성씨도 사림의 영향을 받아 성완의 손자 성세장(成世章)[1506~1583]이 사림계 유현 김안국(金安國)[1468~1543]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사림 성향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후 17세기 사림의 붕당(朋黨) 분립 과정에서 서인의 당색을 지니며 활동하였다.

[17세기 이후 사족의 동향]

시흥 지역은 17세기 들어 정치적으로 사림 계열 인물들의 주요한 지역 기반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이거해 온 사림계 가문들은 새로이 터전을 마련하였고 중앙 정국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사림 정치의 전개와 함께 나타난 붕당의 분기로 시흥 지역의 여러 가문들은 당색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 주목되는 가문은 문화 류씨, 청주 한씨, 안동 권씨, 덕수 장씨, 반남 박씨, 파평 윤씨를 들 수 있다.

문화 류씨의 경우 16세기 후반 류수천(柳壽千)·류잠(柳潛)을 잇는 계파가 시흥 지역에 기반을 마련하였다. 류잠의 처모가 16세기 시흥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이자 훈구 세력이었던 강희맹의 딸로, 진주 강씨와의 혼인을 계기로 문화 류씨가 시흥 지역에 기반을 마련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류자신(柳自新)[1541~1612]의 딸이 광해군의 비가 되어 광해군 대에 가문의 성세를 이뤘다. 한편 이 시기 문화 류씨는 류희분(柳希奮)[1564~1623]을 중심으로 북인 가운데 대북(大北)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였다. 대북의 또 다른 핵심 세력인 이이첨(李爾瞻)과 연합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주장하여 이를 성사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후일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가문이 일거에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청주 한씨는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한백겸(韓百謙)[1552~1615]과 한준겸(韓浚謙)[1557~1627] 형제 대에 17세기 중앙 정계에 전면 등장하였다. 가학(家學)으로 서경덕(徐敬德)의 학통을 이어받아 북인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선조 때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었으며 한준겸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 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광해군 때 대북의 공격을 받아 전리(田里)로 방귀(放歸)되었다. 한준겸의 딸이 인조의 비가 되어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계기로 재기하여 한준겸서평부원군에,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韓興一)[1587~1651]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청주 한씨 문익공파 가문이 경기도 안산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 1636년(인조 14) 인조의 사패지 하사로 강원도 원주에 있던 한준겸의 묘를 안산 대월면 거모포[지금의 시흥시 거모동]로 옮겨오면서부터이다.

청주 한씨와 함께 17세기 북인으로 정치 활동을 본격화한 가문은 안동 권씨였다. 권협(權悏)[1553~1618]에 의해 북인의 당색으로 일찍이 알려졌으며 소북(小北)의 영수였던 류영경(柳永慶)과의 혼맥(婚脈)과 권대임(權大任)이 선조의 부마로서 국혼 등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이 가문이 시흥 지역에 기반을 마련한 때는 17세기 초반이었다. 가문의 현조인 권협이 죽은 이후 부평 수탄리에 장사지냈고, 이후 인천 도곡과 안산 일대를 가문의 묘산이자 재향 기반으로 운영하였다. 권협의 손자 대에 이르러 안동 권씨는 남인의 핵심 가문으로 부상하였다. 학문적으로도 기호남인(畿湖南人) 학맥의 중심 인물들인 조경(趙絅)·허목(許穆) 등과 교유하였고, 권대운(權大運)[1612~1699]·권대재(權大載)[1620~1689] 등의 남인계 붕당의 핵심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반대 당파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은 숙종 대 후반 서인들의 정치적 우위가 확립됨에 따라 쇠락하게 되었다.

덕수 장씨는 장순룡(張舜龍)을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조선 건국을 전후하여 과천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 계기는 장충보(張忠輔)[1458~1512]의 묘소를 과천 방배곡에 마련하면서부터이다. 16세기 후반부터 덕수 장씨는 문과 급제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였으며, 특히 장유(張維)[1587~1638]가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됨으로서 가문이 번성하였다. 덕수 장씨는 서인의 핵심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장유는 서인 내에서도 공서파(功西派)의 입장에서 현실론을 강조하였다.

반남 박씨 가계 중 시흥 지역으로 이거한 계파는 박응복(朴應福)[1530~1598]·박동량(朴東亮)[1569~1635] 계이다. 반남 박씨는 16세기 후반 선조와 연이은 국혼을 통해 외척가로 부상하였다. 반남 박씨는 정치적으로 서인으로 활동하였다. 광해군 대에 한때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서인 정국이 전개되자 유력한 정치 세력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풍양 조씨(豊壤趙氏), 부여 서씨(扶餘徐氏) 등 17세기 경세 관료적인 성향이 강한 한당(漢黨) 계열의 가문과 혼인을 맺어 호서 지역을 기반으로 한 김집(金集)·송시열 계열의 산당(山黨)과 구분되는 경세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가문의 성향은 박세채(朴世采)에 의해 18세기 주요 정치 이념인 탕평론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17세기 후반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될 때 박미(朴瀰)·박세교(朴世橋)의 후손들은 노론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영조 연간의 박필주(朴弼周)는 산림으로서 당시 노론 내의 대표적인 학자였으며 18세기 학계의 큰 화두였던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는 낙론(洛論)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파평 윤씨 가문이 시흥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윤사로(尹師路)[1423~1463]의 손자인 윤승유(尹承柳)[1475~1505]에 이르러서였다. 윤승유가 죽은 후 안산 수리산에 그의 장지를 마련하였고, 이후 이곳이 가문의 세장지가 되었다고 한다. 조선 전기 왕실 등과 유력한 혼인을 맺으며 훈구 계열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파평 윤씨의 가문 성향은 16세기에 들어 사림의 성향으로 변화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 정치적으로 현달했던 파평 윤씨는 서인으로, 그리고 서인의 분립 이후에는 소론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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