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334
한자 近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Er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훈도

[정의]

개항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 경기도 시흥 지역의 역사.

[개설]

개항 이래 조선은 외세의 개입과 수탈 속에서 쇠락해 갔다. 개화파가 주도한 갑오개혁(1894~1896)과 대한제국의 선포를 통해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자강 부흥을 노렸으나, 이미 기운 국운을 되돌리기 어려웠었다. 결국 1906년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면서 조선 사회의 근대적 개혁은 일제에 의해 주도되었다. 당시 경기도 시흥 지역의 지방 제도, 농업, 교육 등 주요한 근대적 변화 역시 식민지의 근대라는 굴절된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지방 제도]

지방 통치 체계는 지역 주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봉건적 질서가 근대적 행정 시스템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현재의 시흥 지역을 포함한 지방의 근대적 개편과 개혁은 갑오개혁 시기에 시작되어, 통감부 시기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갑오개혁 이전 지방의 수령[군수·현감]은 조세 징수권, 군사권, 재판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들 고을 수령의 전횡이 심했으며,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지방 행정이 문란하였다. 갑오개혁 당시 개화파 정부는 고을 수령의 조세권, 지방 경찰권, 재판권을 행정과 분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준비 부족과 기득권층의 반발로 일시 후퇴되기는 했으나, 국권이 사실상 일제로 넘어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후 갑오개혁의 구상은 구체화되었다. 예를 들어, 통감부는 안산세무분서와 인천세무분서를 두어 시흥 지역의 조세 부과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재판 업무도 인천재판소와 수원재판소의 관할이 되었고, 경찰 업무도 인천경무서와 경기경무서의 소관이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시행된 우체 업무는 1904년 군 단위로 생긴 우체관서에서 담당하도록 하였다. 우편 제도는 조선인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대표적 근대 문물 제도였다.

행정구역은 1895년 개편과 1914년 개편으로 안산군이 해체되어 몇 개의 면이 시흥군 군자면수암면으로 편입되었고, 인천부의 일부 군은 부천군 소래면이 되었다. 시흥군 수암면군자면, 부천군 소래면은 이후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시흥시가 되었다. 일제는 1917년부터 면을 지방 행정의 기본 단위로 삼는 면제를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시흥 지역에서도 근대적 관료 행정 체계가 기본 틀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행정 체계는 근대의 완성보다 효율적인 식민 지배 체제 구축에 근본 목적이 있었다.

[농업]

경기도 시흥시는 근대 이전부터 식민 지배가 끝날 때까지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지역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전정(田政)의 문란으로 농민들은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근대적 농업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농지의 소유권부터 정비하는 일이 중요하였다.

1899년부터 1901년에 걸쳐 광무양전 사업(光武量田事業)이 진행되었다. 양전은 농토의 소유자와 경작자, 실제 수확량을 조사하는 사업이다. 농토의 수확이 조세의 기반이었으므로 정확한 파악이 중요하였다. 시흥 지역에서도 양전을 통해 기초 자료가 작성되었다. 이어 일제에 의한 토지 조사 사업이 시행되었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14년까지 토지 조사 사업이 진행되어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결정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은 관행이었던 시흥 농촌의 공동체적 토지 소유 관계를 해체했으며, 토지 과세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제는 본국으로 반출할 쌀 생산을 늘리기 위해 1910년대부터 관개 시설을 개선하고 비료 투입량을 늘렸다. 1920년대에는 산미 증식 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워 개량종 벼의 파종과 수확량이 높은 줄모 방식의 모내기를 적극 독려하였다. 1928년 시흥 지역의 개량종 벼 재배 논이 전체의 95%에 이르렀다. 1920년대 말부터 시흥 지역에 4곳의 수리조합을 결성하여 천수답(天水畓)이었던 논을 모두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으로 바꾸었다. 일제의 강요에 농민들의 노력이 더해져 시흥 지역의 농업은 근대적으로 변모했으나, 소작농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져 이 지역 농민들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었다.

[교육]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신분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국민이 교육받을 권리를 갖는 근대 교육이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의 교육관도 근대적으로 바뀌어 갔고, 사회적 진출의 길도 학교 교육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체제가 틀을 갖추어 나갔다.

경기도 시흥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는 1901년경 지금의 시흥시 과림동무지내에 세워진 무지내여학교이다. 무지내여학교는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 직후 국권을 지키려면 조선의 젊은이를 애국심으로 충만한 인재로 키워야 한다는 교육 계몽 운동이 시작되었다. 시흥 지역에서도 1906년 정윤영(鄭允永)이 인천부 황등천면 중림리[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세운 학교를 시작으로, 1908년에는 황등천면 두곡리[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전우태(全宇泰)가 창흥측량학교(昌興測量學校)를 설립했다. 인천부 신현면[지금의 시흥시 포동]에는 1908년 엄선영(嚴選永)의 흥인의숙(興仁義塾)과 정형택(鄭炯澤)·정우택(鄭禹澤) 형제가 진명의숙(進明義塾)을 세웠는데, 이들 학교는 근대 신학문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하여 교육 계몽 운동기에 설립된 사립학교를 억압하였는데, 무지리여학교는 사립학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 일제의 교육은 민족의식을 억압하고 일본 문물을 주입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조선인 학교는 일본인 학교와 차별을 두었다. 시흥 지역에는 중등 교육기관이 없었으며, 소래공립보통학교·군자공립보통학교·군자공립심상소학교 등 초등 교육기관만 3곳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근대 교육이 보급되었지만, 교육 수요에 비해 공급은 크게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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