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0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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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Gujimal|Gujimal Village |
이칭/별칭 | 구지리(仇之里),구지리(九芝里),꾸짓말,ᄭᅮ지말,구진말,꾸진말[故老],꾸지말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상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재철 |
구지말 - 경기도 부천시 상동 | |
성격 | 마을 |
[정의]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개설]
구지말은 구지리(仇之里, 九芝里), 꾸짓말, 꾸지말, ᄭᅮ지말, 구진말, 꾸진말[故老]이라고도 하였다.
[명칭 유래]
여러 이칭의 기본형이라 생각되는 구지말은 ‘구지마을’의 준말이다. 국어학계에서는, ‘구진말’은 구지[串]+ㅅ+말[村] 정도의 구짓말에서 ‘말’의 ‘ㅁ’이 비음이어서 ‘짓’이 ‘진’으로 변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꾸진말’은 구진말에서 어두 경음화 현상으로 나온 것이다. 한편 ‘꾸지말’은 구지+말 정도에서 온 구지말이 어두 경음화 현상으로 나온 것이다.
구지는 고지나 곶과 같은 의미인데 곶[串]은 바다나 하천 쪽으로 삐죽하게 뻗은 육지를 말한다. 오늘날의 지형과 달리 구지말은 하천 쪽으로 내민 구지의 끝자락에 형성된 마을이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마을 전체가 추녀 끝까지 물에 잠겼다고 전해진다. 이때 경인수도선로의 이북과 한강 연안 일대가 전부 침수되어 모내기를 한 약대 벌판이 범람하고[『조선일보』, 1925. 7. 14.], 부평역 앞까지 물이 밀려들었다[『조선일보』, 1925. 7. 23.]. 구지말이 소재한 소사평야·부평평야·김포평야는 지대가 낮은 조습지로서 홍수가 나면 굴포천을 통해 한강물과 조수가 밀려들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형 탓에 부천은 ‘홍수 범람 돌발지’나 ‘홍수 범람 빈발 지역’이 많았다. 심곡동의 깁푼구지[『지지조서』, 1915]의 구지도, 주화곶면[『여지도서』, 1765]의 고지[串]도 구지말과 같은 경우로서 물과 관련된 지명이다.
[형성 및 변천]
1기[1989~1992] 신도시 건설 때 제1차로 수용된 구지말은 남쪽의 상산[상아산, 현 거마산과 성주산 일부]의 줄기 하나가 북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오다가 마지막으로 맺힌 혈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사단사거리 탁고개에서 경인가도 공사 때문에 산맥이 한 번 끊기고 송내역 어름에서 경인선 때문에 또 한 번 맥이 끊겼다. 하지만 신도시 건설 이전까지는 구지말이 삐중다리[곶]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본 사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원 지형[initial form]의 의미를 잘 간직한 지명이 ‘구지리’이다.
이뿐 아니라 구지말은 오랜 역사성을 지닌 행정 지명이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부평부 석천면 구지리(仇之里)로 나온다. 그 후 한자가 ‘구지리(九芝里)’로 바뀌어 1895년 부평군 석천면 구지리, 1914년 부천군 계남면 구지리, 1931년 부천군 소사면 구지리, 1941년 소사읍 구지리였다가, 1973년 부천시로 승격되면서 구지리(九芝里)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상리와 합쳐 송내·상동으로 되었다가, 1985년 분동을 할 때 송내에서 상동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한때 본동이었던 구지말이 기찻길 맞은편 산골과 솔안말, 그리고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던 육반[새구산=구산말], 칠반[객개=뱃들]과 행정적으로 무관한 지역이 되었다. 『지지조서』[1915]에 의하면 구지리는 구지말을 가리키는 마을 이름인 동시에 솔안말, 산골, 산우물을 대표하는 법정동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형적 특성과 역사성을 무시한 채 구질구질하다는 언어 혐오 인식 때문에 송내역과 송내동 명칭 제정 때 솔안말에 밀리더니, 이제는 그것마저도 엉뚱하게 대산동이라 하여 소멸, 화석화되어 가고 있다.
구지말은 원래 여주이씨 집성촌으로 권세가 있는 반촌(班村)이었다. 김포 장릉의 참봉을 지낸 이인구[1856~?]가 이 마을 사람이며, 그의 아들 이필하[1886~?]는 석천면 면장을 지냈다. 광복 후 소사읍장을 지낸 이필국[1908~?]씨도 있다. 능참봉 이인구는 고종의 친형인 흥친왕의 장인으로 이희공비[1883~1978]의 아버지이다.
[현황]
현재 송내역 북광장 동쪽에는 유서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옛 구지리 84번지]가 서 있다. 자연 부락 시절의 지장물로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곳이 구지말 원 동네의 어귀였다. 뒷날에는 기찻길 건널목부터 집들이 들어서 동서로 난 한강수리조합 수로를 건너 원 동네와 함께 북쪽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그러니까 송내대로 동쪽 광장에 있는 은행나무[현 부천시 중동·상동 상징 수목], 부천상동행복주택아파트, 애향비[1997], 투나, 국민건강보험공단 부천북부지사, 송내 영화의 거리, 메리츠화재, 유광빌딩 등이 구지말 지역에 속한다. 북쪽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까지는 마을이 못 미쳤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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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2 | 구지말 | <소표제>[현황]</소표제> <문단>1970년대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상살미가 있고,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역'>송내역</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지명>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점에 툭 튀어나온 산줄기가 있는데, 이곳에 많은 집들이 모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명 검색='1' 검색어='장말'>장말</지명>이나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이'>사래이</지명> 정도 크기의 마을이다. <지명 검색='0' 검색어=''>구지리</지명>로 표기해 놓고 있다. <지명 검색='0' 검색어=''>물운개</지명> 위쪽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이'>사래이</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 앞에 <지명 검색='0' 검색어=''>장포평</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장포들</지명>이 있었다.<지명 검색='1' 검색어='경인선'>경인선</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역'>송내역</지명> 근처에 있던 마을로,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동'>송내동</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지명>이 분동된 뒤 <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 11통</지명> 지역에 해당된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군'>부평군</지명> 때에는 <지명 검색='0' 검색어=''>석천면 구지1리</지명> 지역이었다. 현재는 <지명 검색='0' 검색어=''>둘리거리</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송내대로</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송내지하차도</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투나'>투나</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인천지방검찰청</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상1동 주민센터</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상동지구대</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공원'>구지공원</지명> 일대이다.</문단>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역'>송내역</지명>에서 아래로 <지명 검색='0' 검색어=''>송내지하차도</지명>를 포함해서 <지명 검색='0' 검색어=''>송내대로</지명>로 이어진 곳이 바로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이다. <지명 검색='0' 검색어=''>부일로</지명> 221번길, 205번길,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공원'>구지공원</지명>까지가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이다. <지명 검색='0' 검색어=''>부일로</지명> 396, 402, 412, 413, 445, 446, 454, 455, 461번지 일대이다.</문단> <참고문헌> <문헌>한도훈, 부천의 땅이름 이야기(부천문화원, 2001)</문헌> <문헌>부천포커스(http://www.focusnews.co.kr)</문헌> <문헌>인천,부천역사(http://cafe.naver.com/bcmoonhwa.cafe)</문헌> |
2010.12.20 | 구지말 | 1) <소표제>[명칭유래]</소표제> <문단>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온 동네가 물에 잠겨 지붕 추녀 끝까지 침수되었다. 그 뒤에도 이 지역은 크지 않은 비에도 물에 잠기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그럴 때마다 땅이 질어서 구질구질하였을 것이므로 자연히 마을 이름도 <지명 검색='0' 검색어=''>구지리(九芝里)</지명>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과거 이 지역에 구지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도 전해진다.</문단> --> <문단><서명 검색='0' 검색어=''>조선지지자료</서명>에는 <지명 검색='0' 검색어=''>석천면</지명>에 속하는 <지명 검색='0' 검색어=''>구지리</지명>로 되어 있다. <지명 검색='0' 검색어=''>구지리</지명>에는 <지명 검색='0' 검색어=''>상산</지명>이라는 상살미가 있었고, 상살미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곳에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에서 구지, 고지, 꾸지가 '곶'이라는 뜻으로 툭 튀어나온 곳을 말한다.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은 '거마산 아래에 있던 상설미에서 앞으로 툭 튀어나온 산줄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지명 검색='1' 검색어='장말'>장말</지명>이나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이'>사래이</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솔안말'>솔안말</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산골'>산골</지명> 같은 이웃마을 사람들은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을 일컫어 구진말, 꾸진말로 불렀다. 이 꾸진말 하나로 '꾸질꾸질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온 동네가 물에 잠겨 지붕 추녀 끝까지 침수되었다. 그 뒤에도 이 지역은 크지 않은 비에도 물에 잠기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그럴 때마다 땅이 질어서 구질구질하였을 것이므로 자연히 마을 이름도 <지명 검색='0' 검색어=''>구지리(九芝里)</지명>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과거 이 지역에 구지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도 전해진다.</문단> 2) <소표제>[형성 및 변천]</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은 <지명 검색='1' 검색어='성주산'>성주산(聖柱山)</지명>에 포함되었던 마을로 과거에는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 앞까지 <지명 검색='0' 검색어=''>서해</지명>의 조수가 밀려들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천'>부천</지명>에서 두 번째로 <기관 검색='1' 검색어='부천남초등학교'>부천남초등학교</기관>가 들어선 것으로 미루어 마을의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명 검색='1' UCI='G002+AKS-KHF_13C720C77CD55CB1895X0' 검색어='유일한'>유일한</인명> 박사가 1936년에 세운 <기관 검색='1' 검색어='유한양행'>유한양행</기관> 공장 시절에 지었던 집이 <기관 검색='0' 검색어=''>심곡도예연구소</기관>로 이름을 달리하여 그대로 남아 있고, 공장 건물 두 채가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다. <기관 검색='1' 검색어='유한양행'>유한양행</기관> 터는 현재 <지명 검색='0' 검색어=''>극동아파트</지명>가 들어서 있다.</문단> -->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은 <지명 검색='1' 검색어='성주산'>성주산(聖柱山)</지명>에 포함되었던 마을로 과거에는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 앞까지 <지명 검색='0' 검색어=''>서해</지명>의 조수가 밀려들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 앞에는 물문개라고 새서 <지명 검색='0' 검색어=''>구지내</지명> 냇물하고 <지명 검색='1' 검색어='거마산'>거마산</지명> 활굴에서 내려온 냇물이 합쳐지는 곳이었고, <지명 검색='0' 검색어=''>베뜰</지명>이라고 해서 배를 매어두고 이용하던 땅이름이 있었다.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에는 조선시대 때 조창이 있어 세곡미를 실어 날랐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해 준다. 일제시대까지 이 조창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문단> 3) <소표제>[현황]</소표제> <문단><지명 검색='1' 검색어='경인선'>경인선</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역'>송내역</지명> 근처에 있던 마을로,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동'>송내동</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지명>이 분동된 뒤 <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 11통</지명> 지역에 해당된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군'>부평군</지명> 때에는 <지명 검색='0' 검색어=''>석천면 구지1리</지명> 지역이었다.</문단> --> <문단>1970년대에 제작된 지도를 보면 상살미가 있고,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역'>송내역</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부평</지명>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점에 툭 튀어나온 산줄기가 있는데, 이곳에 많은 집들이 모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명 검색='1' 검색어='장말'>장말</지명>이나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이'>사래이</지명> 정도 크기의 마을이다. <지명 검색='0' 검색어=''>구지리</지명>로 표기해 놓고 있다. <지명 검색='0' 검색어=''>물운개</지명> 위쪽 <지명 검색='1' 검색어='사래이'>사래이</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말'>구지말</지명> 앞에 <지명 검색='0' 검색어=''>장포평</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장포들</지명>이 있었다.<지명 검색='1' 검색어='경인선'>경인선</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역'>송내역</지명> 근처에 있던 마을로, <지명 검색='1' 검색어='송내동'>송내동</지명>에서 <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지명>이 분동된 뒤 <지명 검색='1' 검색어='상동'>상동 11통</지명> 지역에 해당된다. <지명 검색='1' 검색어='부평군'>부평군</지명> 때에는 <지명 검색='0' 검색어=''>석천면 구지1리</지명> 지역이었다. 현재는 <지명 검색='0' 검색어=''>둘리거리</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송내대로</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송내지하차도</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투나'>투나</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인천지방검찰청</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상1동 주민센터</지명>, <지명 검색='0' 검색어=''>상동지구대</지명>, <지명 검색='1' 검색어='구지공원'>구지공원</지명> 일대이다.</문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