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송국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1088
한자 宋國瞻
영어음역 Song Gukcheom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강옥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남도 진주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250년(고종 37)연표보기
본관 진천
대표관직 감찰어사|판비서성사|형부상서

[정의]

고려 후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활동사항]

송국첨의 본관은 진천(鎭川)이며,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다. 1226년(고종 13) 금나라의 장수 우가하(于哥下)가 침입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우군장(右軍將)이 되어, 김희제(金希磾)·손습경(孫襲卿)과 함께 보기(步騎)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우가하를 물리치고 개선하였다. 정언을 거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가 된 뒤 정방에 들어갔으나 아부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려 했으므로 최이(崔怡)가 좋아하지 않았다. 뒤에 박훤(朴萱)이 권세를 휘두르자 정방을 떠났다.

1231년 몽고가 침입하자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따라 살리타[撒禮塔]와 강화를 체결하는 자리에서 공을 세웠다. 1243년(고종 30) 9월에 집권자였던 최우(崔瑀)가 대사성 송국첨(宋國瞻)과 간의(諫議) 홍균(洪鈞)을 보내어 고려의 옛 부천 지역인 안남(安南)의 지세를 살피게 하고, 수로를 파서 바다와 통하게 하려다가 여의치 않아 중지하였다.

당시의 계획 목적이 배수로를 내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배가 다닐 수 있도록 운하를 파려고 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보다 앞서 고려 인종 때 태안반도 안흥 앞바다의 험한 뱃길을 피하기 위하여 운하를 파다가 중단한 사실이 있고, 조선 중종 때에도 김안로굴포천을 이용하여 운하를 파려다가 중단한 사례가 있어 조운(漕運)이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도록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형부상서로 경상도 순문사로 나갔을 때는, 송광사의 중으로 국가와 백성에게 막대한 폐해를 끼치던 만전(萬全)[최우의 서자로 속명은 최항]을 탄핵하여 소환하게 하였다. 그러나 곧 최항(崔沆)의 참소로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좌천되었고, 1249년 최항이 집권하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지서북면병마사(知西北面兵馬事)로 좌천된 뒤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분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책임감이 강한 유능한 관리였다고 전한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