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01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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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得男 |
영어음역 | Gim Deuknam |
이칭/별칭 | 선술(先述),매죽헌(梅竹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남달우 |
[정의]
1637년 병조호란 때 부천 지역에서 활약한 무신.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선술(先述), 호는 매죽헌(梅竹軒). 전라남도 함평 출신이다. 아버지는 김억창(金億昌), 아들은 난포만호(蘭浦萬戶)를 역임한 무장 김방보(金邦寶)이다.
[활동사항]
김득남은 신장이 매우 컸으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젊어서 무과에 급제하여 서천포만호(舒川浦萬戶)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함녕군(咸寧君) 이항(李沆)을 따라 반정군에 가담하여 앞장서서 입궐하였다. 김득남은 되찾은 옥새를 이항에게 주어 승리의 공을 이항에게 돌렸으며,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사도첨사(蛇島僉使)에 제수되었다. 1635년(인조 13) 형조의 절충(折衝)으로 있을 때는 화적인 민수이(閔守伊)를 잡아 공을 세웠다.
한강의 철곶첨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도에 청의 군대가 침입하였다. 한양에서 강화도로 통하는 길목인 부평에서 청군이 민간인을 포로로 잡아가자, 그들을 탈환할 목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였으나 자원하는 군사가 없었는데, 김득남이 홀로 자원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당시 대군(大君)으로 있던 효종이 백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김득남은 양정(梁挺)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나와 현재의 부천 지역인 부평 근처에서 적에게 항전하다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사후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추증되었으며, 강화 표충사(表忠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