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B010103 |
---|---|
지역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택희 |
“여흥민씨 세 개 파가 이곳에 자연스럽게 모였는데 촌수는 좀 멀었죠. 그 자손들이 아직까지 이곳에 정착하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경숙옹주님이 작동에 머무신 것이 돌아가시기 20년 전쯤인 것 같아요. 이후 5대손 안팎의 후손들이 시차를 두면서 이곳으로 왔지요. 여흥민씨 세 개 파가 이곳에 자연스럽게 모였는데 촌수는 좀 멀었죠. 그래도 그 자손들이 아직까지 이곳에 정착하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민경홍, 여천위 민자방의 16세손, 1931년생)
부천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가문 중의 하나인 여흥민씨 종가는 아직도 가문의 업을 잊지 않고 삼대가 모여 일가를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더 했겠지만 지금도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종손이 끝내 낙향해서 종가의 업을 잇는 일이 더러 있다. 이처럼 사람들의 의식 속에있는 종가의 의미는 매우 큰 편인데 특히 여흥민씨 종가는 왕가의 혈통과 능묘를 지키면서 세속에서 벗어나 있었다.
여흥민씨는 경숙옹주 묘를 모시기 위해 가계 5대손 내외가 모여 한 마을을 이루었다. 때문에 현재 작동에 거주하는 민씨들은 모두 민자방의 후손이면서 실은 세 개의 소파(小派)로 구성된 먼 친척간이다. 예컨대 일제시대 기록된 민석홍 집이 ‘공덕리댁’으로, 민병유 집이 ‘용산댁’으로, 민영기 집이 ‘돌머리댁’으로 각각 불렸다고 하는데 이 세 집이 각 소파의 유력자였던 셈이다.
일제강점기 때 국세조사자료에서 확인되는 여흥민씨들의 친족관계를 보면 세 개의 소파는 대략 6~10촌 범위였다고 한다. 이중에서 한 파는 19세에서 먼저 갈리고, 또 다른 두 파는 22세에서 갈린다. 따라서 현재 작동에 가장 많은 경자 돌림, 즉 32세를 기준으로 봤을 때 각 소파들은 20촌 이상이 넘는 비교적 먼 촌수관계에 있는 셈이다. 이 때문인지 여흥민씨는 같은 선조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내적인 결속력이 강한 편은 아니라고 한다.
현재 작동을 세거지로 하는 여흥민씨의 모임, 혹은 여천위 민자방의 후손들로 구성된 모임이 따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데, 적어도 마을노인들의 기억이 미치는 범위에서는 예전에도 문중조직이라 할 만한 것이 따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여흥민씨 대종회나 장령공파 종친회가 조직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동의 여흥민씨들은 여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먼 촌수에 대한 낮은 친밀감과 급격한 세대 감소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비록 세월이 많이 지나 세대수가 부쩍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직 동일한 자리에서 조상의 선산을 모시는 후손의 마음가짐이 거룩해 보였다. 하지만 첩첩산중의 외딴 역사마을 작동을 지키기 위한 마땅한 대응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더 이상 여흥민씨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또한 고조되고 있다.
“지금 이곳에 민씨 가구가 아홉 가구 정도 남아 있어요. 예전에 많이 살 때는 한 스무 가구가 넘었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죠. 저희 할아버지가 형제 네 분인데 형제분들이 모두 여기서 사셨으니까요. 저희가 제일 큰 집이고 둘째 증조부님이 저 아래 한옥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에서 사셨어요. 셋째 증조부님께서 요 앞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사셨구요. 넷째 증조부님은 그 옆에 지금 새로 지은 양옥집이 있는데 그 곳에 사셨죠. 그렇게 한 가족이 모두 이곳에서 살면서 서로 의지했어요.”(민경흥, 여천위 민자방의 16세손, 1931년생)
작동은 비록 부천의 타 지역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아름다운 풍광과 계절이 분명한 축복받은 땅이다. 이 땅에서 수백 년 동안 조상의 문화유산과 그 정신을 지키며 사는 종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한층 더 긍지를 갖게 한다. 하지만 종가의 명맥은 이제 서서히 흐려지고 있다. 옛 집을 지키는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생업과 자녀 교육문제로 젊은 후손들이 도시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현재 민씨 가구는 아홉 가구가 남아있지만 지속적으로 작동에서 생활하고 있는 여흥민씨 집안은 약 6세대 정도라고 한다. 이제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토박이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일가의 수가 많이 줄어든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반대로 그만큼 ‘일가’라는 느낌이 더 강해지는 면도 있다고 하니 앞으로 우의가 더욱 돈독해지길 바란다. 누구 찾아오는 이 없이 수백 년 간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여흥민씨 일가야말로 그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