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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C030103
지역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원

부천의 혁명촌, 겉저리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농촌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대대적인 농촌개량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모범적으로 정부가 권하는 개량운동을 시행하는 일종의 시범마을을 당시에는 혁명촌이라고 불렀다. 5·16군사 혁명의 유산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이 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농촌의 특정 마을을 모범 마을로 선정하고, 정부 주도의 농촌 개량 운동을 시행한 것은 이미 일제하부터 이루어진 지배 수단이었다. 일제하에 ‘모범부락’으로 생겨난 정책적 관행은 해방 이후 자유당 정권에서도 이어졌다. 농촌의 환경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모범부락운동은 농민의 삶을 개선시키는 측면도 있었지만, 국가 기관이 강압적으로 시행함으로써 농민들에게는 많은 어려움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시행된 혁명촌 운동 역시 강압적으로 전개된 측면이 있었다.

일제시기부터 모범부락이었던 겉저리는 1960년대 혁명촌으로 부천 지역에서는 농촌 개선 운동의 중심지였다.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이정웅 할아버지는 혁명촌 운동이 군대식으로 이루어졌었다고 하시면서, 그로 인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의 고초에 대해 증언해주셨다. 개량운동은 군인들이 주도하여 공무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공무원들이 다시 주민들에게 지시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시가 떨어진 과제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군인들이 직접 공무원들에게 구타하는 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계장이고 뭐고 없어. 읍장이고, 다 맡아가지고 집집마다 배당이 되가지고, 그거 안됐으면 나와 가지고 군인이, 혁명촌 때니까, 그냥 보는데서... 그러니 거 공무원이 무슨 죄야? 우리가 안 해서 공무원이 맞으니까. 그래서 그걸 해주고.”(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이때 개량사업으로 추진되었던 것들은 농촌 생활환경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마을 청소, 가옥 개량의 일환으로 지붕 개량, 아궁이 개량, 벽에 회칠하기, 찬장 개량, (벽돌)냉장고 설치 등이었다. 새벽부터 주민들은 동네 청소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아궁이나 지붕 등을 고쳤다. 또 구식 부엌에는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서늘한 공간을 만들어 지금의 냉장고 처럼 사용하게도 했다. 특히 벽에 회칠하는 작업도 많이 했는데, 그 때문에 혁명촌 시절에 겉저리가 죄다 하얗게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겉에 죄다 발라 놓으니까, 앞만 바르는 게 아니고, 죄다하니까, 하얀 걸로 발랐으니까 저기서 봐도 침침하지가 않지! 하얗게 발랐으니까 환하지! 하여튼 깨끗은 하니까.”(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회칠을 할 재료는 행주대교 부근 행주나루에서부터 파오기도 했다. 군부대에서 트럭을 제공하면, 주민들이 삽을 가지고 가서 직접 행주나루 부근의 고운 모래를 파다가 횟가루와 섞어서 바르곤 했다.

혁명촌 시절에 행해진 일련의 사업들로 인해, 마을이 청결하게 유지되기도 하였고, 주민들의 거주 공간 곳곳을 손보게 되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개선되는 부분도 있었다.

“근데 해놓으면 좋다고, 아궁지(아궁이) 개량 뚜껑해가지고, 무쇠로 해가지고 뚜껑 해 닫으면, 불 때고 닫어 놓으면, 방이 안 식잖아. 가둬놓으니까.”

“회 찌꺼기지! 그냥 실어다가 벽에다 칠 해주고 칠 해주고, 그래서 달빛이면 달빛이 반사가 돼서 환한 거야. 야! 좋긴 좋다!”(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밤낮 없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마을의 환경이 개선되자, 인근 동네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다른 동네에서 견학 온 사람들은 “와! 깨끗하다”하면서 감탄하고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모내기를 하러 방문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하고 몇 사람들이, 혁명주체 세력들이 모내기 하러 왔었다고. 그래 읍사무소는 벼락이 떨어졌지, 모내기 때 길 닦아라, 뭐해라, 그냥, 그러고 보니까, 겉저리 거기 온다는 거야.” (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이처럼 겉저리는 혁명촌 기간 동안 인근의 다른 마을은 물론 대통령이 방문했을 정도로 성공적인 환경 개선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고된 농사일 가운데에서도, 정부 시책에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겉저리 주민들의 고달픈 땀이 배어 있었다.

정보제공자

이정웅, 겉저리 주민, 1939년생

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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