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6D030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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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웅규 |
“왜정 때 남자들은 결혼을 해서 호주로 되어 있으면 징병을 가지 않기 때문에 결혼들을 일찍 했고.”
송내동에는 이제 지역 원로 분들이 거의 계시지 않는다. 그 중에서 조순천, 박병설 할아버지는 송내동에서 거의 가장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송내동에 일어났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간직하고 계셨다. 특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심심찮게 등장한다. 송내동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온 그 분들은 송내동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지역 원로 분들이 공통적으로 들려주신 일화 중 하나가 조혼이었다. 군대를 갔다 온 분들이라면 어느 자리에서든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라서 그런지 전쟁 중 징병을 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을 하신 이야기는 재미있기보다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불과 12~13세의 소년으로 벌써 장가를 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처(妻)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고르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2~13세짜리가 20세 전후의 처녀와 결혼하는 것도 당시에는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인천시 계산동에 살다가 19살에 분가를 하며 이리로 왔지. 왜 이리로 왔냐하면 왜정시대 때 결혼을 해서 분가를 하면 호주가 되기 때문에 징병을 가질 않았어. 그래서 19살에 장가를 들어서 근처인 이곳으로 이주를 한 거지. 나라가 해방이 되고 6·25사변 전에 결혼을 했지. 그때가 21살이었어. 결혼을 일찍 한 이유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왜정 때는 남자들은 결혼을 해서 호주로 되어 있으면 징병을 가지 않기 때문에 결혼을 일찍 했고, 여자들은 만주, 일본으로다가 정신대로 전부 내보내었다고. 그렇기 때문에 시집을 일찍 갔지.”(박병설, 지역 원로, 1929년생) (조순천, 지역 원로, 1923년생)
이처럼 징용과 한국전쟁 등으로 조혼(早婚)이 일반화되기 시작해 4, 50대가 되면 자식은 2, 30대가 되어 대신 농사를 짓고, 본인은 노인행세를 하는 남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옛날엔 부모님 연세가 오십이 되면 집안에서 짚고 다니시라고 울 지팡이(家杖)을 만들어 드렸고, 육십 세가 되면 고을 원님(縣監)이 마을나들이 길에 짚고 다니라고 향장(鄕杖)을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다만 이 시절에도 연애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결혼식은 옛날 방식으로 말 타고 가마타고 그렇게 했지. 중매로 했는데 중매도 두, 서너 번 왔다 갔다 했어. 허허허. 그런데 그때도 간혹 연애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주로 연애를 하는 사람들의 데이트는 산모퉁이나 나무 밑에서 그냥 얘기나 하는 거였지만 말이야. 그 때 극장이 있었는데 지금의 허내과 사거리에 있었어. 왜정 때부터 있던 자리인데 그게 이름이 아마 잔흥관일거야. 당시 영화 필름을 사다가 틀어줬어.”(박병설, 지역 원로, 1929년생)
비록 전쟁이 맺어준 인연이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그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평생을 함께 하셨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군대로, 정신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일제하 조선인의 비극적인 역사가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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