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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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雲門面萬歲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김상구, 김종태가 운문면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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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손기현, 김재화가 독립운동을 환기하기 위한 격문 작성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17일 - 만세 시위운동 촉구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운문면 만세 운동 전개 |
종결 시기/일시 | 1919년 3월 19월 - 운문면 신원리 일경 구타 의거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3·1 운동 발생 |
발생|시작 장소 | 운문면 만세 운동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종결 장소 | 운문면 만세 운동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
성격 | 독립운동|항일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김상구|김종태|손기현|김재화|박창기|김진효|이용환|윤병림|김종식|강재식|장한조|홍용팔|임봉서|박정찬|박재영|최성희|김문근 |
[정의]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
[개설]
3·1운동 당시 청도군에서는 3월 중순부터 5월 초순에 걸쳐 모두 7회의 크고 작은 만세 시위운동이 발생하였다. 특히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들은 관공서 습격, 일본 경찰 구타, 일본인과의 충돌, 자위회 공격 등 점차 격렬한 무력시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청도군 운문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에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청도군 지역은 일찍이 일제의 근대적 민족의식을 갖춘 청년 지식인들이 독자적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고, 나아가 농민 및 노동자 계층이 참여함으로써 대중적인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경과]
운문면 만세 운동 은 1919년 3월 18일 전개되었다. 이미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 시위운동이 서북 지방으로 확산되었고, 경상도 지방에도 그 열기가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운문면의 경우에도 만세 시위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운문면 만세 운동 은 문명 학교(文明學校) 졸업생들이 주도하였다. 당시 문명 학교의 졸업생이던 김상구(金相久)와 김종태(金鍾台)는 광무 황제의 인산(因山)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왔다. 이들은 3월 10일 신원리 김종태의 집에서 서울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 운동을 보고하고, 운문면에서도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5일 밤 손기현(孫琪鉉), 김재화(金在華)는 박창기(朴昌淇)의 집에서 독립운동을 환기하기 위한 격문을 작성하였다. “우리 동포 형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리 강토를 탈환하라. 죽음은 한 번 뿐이고 두 번도 아니다. 우리 동포 형제는 어째서 이다지도 잠잠한가. 동포여, 이때가 어느 때냐. 한번 분발하라.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피와 피, 대한 독립 만세”라는 내용의 ‘격문(檄文)’ 20여 매를 제작하였다. 이들은 3월 15일 밤 3시 경에 방음(芳音), 대천(大川), 순지(蓴池), 오진(梧津) 등지의 마을에 격문을 부착하였다.
3월 17일 밤 손기현을 비롯하여 김진효(金鎭孝), 손한조(孫漢祚), 김용구(金龍久), 김상구, 홍해성(洪海性), 김종식(金鍾軾), 김종수(金鍾秀) 등이 문명 학교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손기현이 『매일 신보(每日申報)』를 보여 주면서 “서북선 지방 각처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떠들고 있는 사실이 매일 신보에 보이니 우리들이 잠자코 있는 것이 좋지 못한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김진효는 “그렇다. 잠자코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므로 만세를 불러 보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촉구하였다.
3월 18일 김진효, 김종태, 김종식, 김상구, 손한조, 강재식(姜在植), 홍용팔(洪龍八), 홍해성, 김대선(金大善) 등이 15일 밤 각처에 첨부한 격문 사건을 조사받기 위해 대천리의 운문 주재소에 호출을 당하였다. 이들은 취조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대천리에서 점심을 먹던 중 만세 시위를 단행하기로 하고 운문면사무소로 갔다. 운문면사무소에서 윤병림(尹炳林), 김재화 등이 합세하였다. 김종태가 길이 2척 되는 명주 수건에 ‘대(大)’자 1자를 썼다. 이어 김진효는 면서기 백상열(白庠烈), 최현규(崔鉉奎), 이용환(李龍煥), 김경수(金景洙) 등 4인으로 하여금 ‘대(大)’에 이어 ‘한(韓)’, ‘독(獨)’, ‘립(立)’, ‘만(萬)’을 각기 1자씩 쓰도록 하고 주동 인물이 나머지 ‘세(歲)’ 1자를 써넣었다. 다시 그 옆에 김종태가 ‘독립회(獨立會)’라 씀으로써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가 적혀 있는 기(旗)가 만들어졌다.
김진효의 개회와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高唱)하고, 운문면 면장 이영호(李永浩)의 집으로 행진했다. 이 때 임봉서(林鳳棲), 이용환 등이 합세하였다. 면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운문면사무소를 나와 동리를 누비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니 대천리의 박정찬(朴廷瓚), 박재영(朴在永) 등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호응하였다.
3월 18일 밤 박영묵(朴永黙), 이용환, 김문근(金文根), 최성희(崔聖熙), 윤병림 등도 공암리의 강정(江亭)에서 동민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하였다.
[결과]
3월 20일 대구(大邱) 일본군 헌병 분견대로부터 헌병 3명과 청도 경찰서장 이하 5명이 출동하였다. 운문면 만세 시위의 주동 인물 김진효, 김종태, 김상구 등 16명이 검거되었다. 1919년 5월 2일 대구 지방 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김진효 2년 6월, 김종태·손기현 각 2년 6월, 김재화·김상구 각 1년, 이용환·윤병림 각 8월, 김종식·강재식·장한조·홍용팔·임봉서 각 6월, 박정찬·박재영·최성희·김문근 각 4월의 징역을 언도 받았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의의와 평가]
청도군 운문면 만세 시위운동은 서울이나 평안도 등 각처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의 영향을 받았으며, 문명 학교 졸업생들이 주도하였다. 만세 운동 당시 ‘격문(檄文)’과 ‘독립 선전문(獨立宣傳文)’ 등을 작성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