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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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改新敎布敎 |
영어공식명칭 | Bangjukmoe Protestantism Propag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양훈도 |
[정의]
경기도 시흥시 호조벌 방죽 일대에서 1895년 무렵 이루어진 개신교의 선교 과정.
[개설]
1880년대 조선 선교에 나선 미국 감리회는 시흥 지역 호조벌 방죽 주변을 의미하는 '방죽뫼' 지역을 중요 선교 거점으로 보고 적극적인 농촌 선교에 나섰다. 1895년 무렵에는 교인이 되기 위해 학습하는 사람이 12명이었다. 1901년 김동현[1869~1928]에 의해 시흥 지역 최초 개신교회인 무지내교회가 세워졌고, 1903년에는 미산교회[미산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 방죽뫼 선교는 시흥 지역에 개신교와 근대식 교육과 문물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에 개신교가 전래한 시점은 1880년대다. 조선 선교를 개척한 북미[북아메리카] 지역의 감리회는 1890년대 중반부터 지금의 시흥시 일대를 서울 이남의 중요 선교 거점 가운데 한 곳으로 보고 전도에 힘썼다. 방죽뫼 지역에서 개신교 포교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한 시점은 1895년경이다.
[경과]
방죽뫼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다. 1890년대 미국의 감리회는 도시를 넘어 농촌 지역 선교에도 힘썼다. 감리교 교회사 자료에 1895년 시흥 지역의 세례 받은 학습자가 1명, 세례 받지 않은 학습자가 11명으로 되어 있다. 주자학과 무속 신앙 등이 강하게 남은 시흥 농촌 지역에서 입교를 앞둔 교인이 12명이 되었다는 사실은 방죽뫼 일대 선교 활동이 어느 정도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결과]
방죽뫼를 중심으로 시흥 지역에 개신교 전파가 이루어진 결과 1901년에는 무지내교회가 설립되었고, 1903년에는 미산교회가 설립되었다. 시흥 지역의 최초 한국인 입교자는 김동현이다. 김동현은 배재학당 출신으로, 1901년 권사에 임명되었고, 1902년 시흥 지방 본처전도사(本處傳道師)[오늘날의 장로에 해당]가 되었다. 김동현은 1901년 자신의 고향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해 1901년 5월 예배당 봉헌식을 올렸다. 무지내교회는 인근 마을에서 다니는 신도까지 1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무지내교회는 예배당 봉헌 후 이화학당 설립자인 메리 스크랜턴(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1909)의 지원을 받아 예배당 옆에 교실을 짓고 매일학교를 열었다. 매일학교는 ‘무지리여학교’로도 불렸다. 무지내교회는 2002년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순직 기념 교회로 선포되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1902년 무지내교회를 돌아보러 오던 도중 수인선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들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1903년 5월에는 방죽뫼 지역인 미산리에 미산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981년 화재로 미산교회 자료가 소실되어, 설립 초기의 실상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시흥 지역은 1890년대 미국 감리회의 적극적인 농촌 지역 선교 정책에 따라 개신교가 비교적 일찍 받아들여진 지역이 되었다. 1900년대 초에는 교회가 두 곳이나 설립되어 종교뿐만 아니라 근대 교육과 문물이 시흥 지역에 전해지는 통로 구실을 했다. 방죽뫼 개신교 포교는 시흥 근대화의 한 과정이었고, 지금의 시흥시 개신교의 뿌리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