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501 |
---|---|
한자 | 新安朱氏三世積善碑 |
영어공식명칭 | Sinan Jussi Third Generation Exploit Epitaph |
이칭/별칭 | 과림동 삼세 적선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35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방문식 |
건립 시기/일시 | 1917년 4월 20일 -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 건립 |
---|---|
보수|복원 시기/일시 | 1922년 4월 28일 - 적선비각 준공 |
현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355 |
성격 | 비와 비각 |
관련 인물 | 주석범|주순원|주인식|주영식 |
문화재 지정 번호 | 시흥시 향토유적 제17호 |
[정의]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과 계수동 안골 주민들이 신안 주씨 3대가 베푼 자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와 비각.
[개설]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新安朱氏三世積善碑)는 시흥시 과림동 출신의 주석범(朱錫範)[1815~1880], 주순원(朱順元)[1836~1895], 주인식(朱寅植)[1862~1952]과 주영식(朱永植)[1867~1952] 등 신안 주씨 3대가 마을에 자선을 베풀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과림동의 중림·부라위와 계수동 안골 등의 마을 주민들이 세운 비이다. 이 비를 통하여 신안 주씨 3대가 이곳 주민들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적선비 우측으로는 주공 영식 자선 기념비(朱公永植慈善紀念碑)가 단독으로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할아버지, 큰아버지, 형과 함께 3대에 걸쳐 빈민을 구휼하고 영농비를 지원하는 등 주인식의 동생 주영식이 빈민 구제에 힘썼다는 내용으로 적선비와 내용이 유사하다
[건립 경위]
생활이 어려웠던 19세기 조선 후기에 주석범은 인천부 황등천면 일리와 중림리[지금의 시흥시 과림동]에 속하는 중림 및 부라위 주민들과 인천부 황등천면 칠리[지금의 시흥시 계수동] 안골 주민들에게 영농비를 지원해 주거나 춘궁기 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이 나눔은 그의 대를 이어 주순원, 주인식의 3대까지 이어졌다. 이에 주민들은 신안 주씨 일가에 대한 고마움을 비와 비각(碑閣) 건립으로 기리고자 하였다. 비문의 건립 배경과 창립 인사들의 명단 등 상세한 내용은 1917년 4월에 발기(-記)한 ‘자선비 창립 통문(慈善碑創立通文)’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는 신안 주씨가 사는 곳, 자선의 내용과 기간, 주무(主務) 한긍렬(韓兢烈), 발기인(發起人) 한문교와 이우승 그리고 찬성하는 사람 8명의 명단이 제시되어 있다.
관련 문건은 경기도 부천군 소래면 주재소에 '자선비 신청서'를 보내 행정 절차를 거쳤는데, 모금에 참여한 주민들은 총 104명이었다고 하며 모금액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자발적인 참여였음을 알 수 있다.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는 1917년 4월 20일에 건립되었다. 비가 세워진 지 5년 뒤인 1922년 적선비를 비바람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민정현, 김상준, 정선엽 등 39명이 발기하여 비각을 건립하였다. 비각의 건축 사항은 1922년 4월 28일 발기인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비각은 1922년 2월 8일 목재를 구입하여 3월 14일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고 4월 28일 준공하였다.
[위치]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는 시흥시 과림동 355번지에 있다. 이 부근은 일명 ‘비석거리’로 불리는데, 시흥시에서는 주변 정비와 수목을 심어 과림동 중림마을에 공원을 만들고, 이 안에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를 두었다. 한편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 우측에는 주공 영식 자선 기념비가 단독으로 있다.
[형태]
비각은 팔작지붕을 얹은 사방 단칸 건물로 규모가 크지 않다. 납작한 방형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를 올려 지붕 가구를 받쳤다. 기둥머리는 네 모퉁이를 터서 도리를 끼운 민도리집인데, 기둥머리 좌우에 소루(小累)[접시받침]를 배치하여 주두(柱頭)를 갖춘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기둥 사이 사방에는 홍살을 둘렀고, 앞쪽에는 두 짝의 문이 있다. 가구는 3량 구조인데 덧서까래를 써서 팔작지붕을 만들었다. 내부 바닥에 전(塼)[흙을 구워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의 납작한 벽돌 모양으로 만든, 동양의 전통적 건축 재료]을 깔고 중앙에 비석을 세웠다. 아래는 네모에 위쪽은 둥근 방부원수(方趺圓首) 양식을 갖춘 비신(碑身)의 높이는 86㎝이며 전면과 뒷면에 각각 적선의 내용과 설립 시기가 새겨져 있다.
[금석문]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에는 앞면과 뒷면으로 나누어져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앞면은 신안 주씨 일가 삼세의 베풂을 칭송하는 내용이며 뒷면은 건립 일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면]
아공삼세 조자손현(我公三世 祖子孫賢)[우리가 기리는 삼세, 할아버지, 아들, 손자 모두가 어질다.]
희사호시 팔십사년(喜捨好施 八十斯年)[기쁘게 베풀고 베풀기를 좋아한 지 팔십 년이 되었다.]
적선여경 불위자천(積善餘慶 不違者天)[선을 쌓으면 경사가 있다는 것을 하늘은 어기지 않는다.]
비창비치 후록면면(俾昌俾熾 後祿綿綿)[번성하고 번성하여 후에는 복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뒷면]
정사년 사월일 립과림리 공손(丁巳年 四月日 立 果林里 共頌)[1917년 4월에 세우고 과림리 사람들이 모두 칭송한다.]
[현황]
2004년 12월 29일 과림동 중림마을에 새로 조성된 공원 준공식이 있었다. 적선비 공원화 사업에 이어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는 2005년 7월 14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7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건립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경제가 넉넉지 않던 시절이라 적선비를 건립했던 이웃 주민들의 신안 주씨 삼세에 대한 고마움 역시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므로 그 진정성을 알 수 있다. 지역마다 산재한 자선비가 많지만 백성들과 상관없이 관리들의 전출·입에 따라 생겨난 공덕비들이 부지기수고 마음이 담기지 않은 자선비도 흔하다. 반면 신안 주씨 삼세 적선비는 마을에 적을 두고 오랫동안 대를 이어 나눔과 선행을 베풀어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세운 적선비이므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