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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154
한자 彌鄒忽
영어음역 Michuhol
이칭/별칭 매소홀(買召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배성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
관련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정의]

고구려시대 인천광역시의 옛 이름.

[개설]

미추홀은 문헌에 나타나는 인천 최초의 지명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 백제 시조 온조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부여계 고구려 유민인 온조비류가 남하하여 온조는 위례성에 나라를 세우고, 비류미추홀에 나라를 세웠다. 또한 미추홀은 지금의 인주(仁州)라는 기록이 있어 미추홀이 인천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인천 인근에 있던 부평과 부천 지역도 미추홀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는지, 별도의 지명이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475년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따라 고구려가 백제를 물리치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고, 이후 미추홀은 매소홀(買召忽)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명칭유래]

백제 때의 지명인 미추홀과 고구려 때의 지명인 매소홀은 같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 판단된다. 학자에 따라서 ‘미’를 ‘물’로, ‘홀’을 ‘고을’로 풀이하여 한자로 ‘수성(水城)’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는 땅이 습하고 물이 짜다는 『삼국사기』기록과 일치한다. 특히 ‘홀’이라는 단어는 ‘성·고을’을 뜻하는 고구려어로, 한강 하류에 정착한 백제의 건국 세력이 자신들의 언어인 고구려어로 이 지역에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형성 및 변천]

청동기 내지 초기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한 미추홀은 독자적인 지배 세력과 지배 기구를 기반으로 성장하다가 곧 위례성에 기반을 둔 한성백제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미추홀이 인천이었음을 비정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이후의 여러 사서들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들 문헌의 기록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지 않아 그 동안 충청남도 아산의 밀두리와 경기도 양주 등이 미추홀이라는 견해가 나오기도 하였다. 최근 문학산 일대를 중심으로 초기 백제의 토기들이 발견되어 조사가 이루어졌고,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에도 대규모 백제 토기 산포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미추홀을 인천으로 비정하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관련기록]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 비류는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 비류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라고 하여 백제 시조 온조왕 즉위년조에 미추홀의 지명이 나타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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