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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277
한자 淸州韓氏
영어의미역 Cheongju Han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기도 부천시 계수동|춘의동
집필자 김원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지 경기도 부천시 계수동|춘의동
입향시기/연도 1400년대
성씨시조 한난
입향시조 한언

[정의]

한란을 시조로 하고 한언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부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韓蘭)은 기자조선을 세운 기자를 조상으로 하는 우량(友諒)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청주한씨대동보」에 의하면, 우량은 마한이 망한 후 신라에서 벼슬을 하여 한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우량의 32세손 한란은 928년(태조 11)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공을 세운 공신으로 청주에 정착하였고, 이후 후손들이 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청주한씨는 특히 고려와 조선 전반기에 크게 세력을 떨쳤는데,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지 않은 예가 드물 정도였다.

부천에 입향한 청주한씨는 많은 인물이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한언의 세 아들 한홍윤(韓弘潤), 한홍택(韓弘澤), 한홍주(韓弘澍)는 각각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언양현감, 선전관을 지냈다. 한홍윤의 아들 한용은 공조참판을 지냈고, 한홍주의 아들 한진(韓鎭)[1503~?]은 적순부위(迪順副尉)를 지냈다. 한진의 두 아들 한수경(韓守慶)[1522~1600]과 한수우(韓守佑)는 각각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과 내금위를 지냈다. 한수경의 아들 한준(韓準)[1542~1601]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한준의 두 아들 중 한여직(韓汝稷)[1575~1638]은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한수(韓穗)는 사복정(司僕正)에 추증되었다.

한수의 아들 한오규(韓五奎)는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한오규의 아들 한숙(韓塾)[1646~1710]은 형조정랑·금천군수를 지냈다. 한숙의 첫째 아들 한덕흠(韓德欽)[1669~?]은 경학과 예술에 뛰어났고, 둘째 아들 한성흠(韓聖欽)[1679~?]은 회령부사를 지냈다. 넷째 아들 한용흠(韓龍欽)[1704~1775]은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를 지냈다. 한덕흠의 세 아들 한순(韓洵)[1704~1745], 한황(韓滉)[1692~1728], 한유[1696~1728]는 각각 통덕랑, 선전관, 홍문관 정자를 지냈다. 한순의 첫째 아들 한주악[1709~1786]은 통덕랑을 지냈고, 경학과 효행이 뛰어났다.

춘의동으로 분가한 한홍연의 첫째 아들 한구는 강원도사와 의주목사를 지냈으며, 한구의 첫째 아들 한수덕[1522~?]은 강원도사와 좌집의(左執義)를 지냈다. 한구의 둘째 아들 한수성은 호조정랑·금구현감을 지냈다. 한수성의 둘째 아들 한탁은 장연현감을 지냈고, 한탁의 아들 한성은 고부군수를 지냈다.

[입향경위]

15세손 한언(韓堰)이 부천에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한언의 아버지 한명진(韓明溍)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 한명회의 친동생이다. 한언은 대사헌 등을 지낸 후 낙향하여 현 부천시 계수동 지역에 입향하였다. 한언의 넷째 아들 한홍연계수동에서 분가하여 현 춘의동에 정착하였다.

[현황]

부천시에 세거하는 청주한씨는 이양공파로 계수동춘의동을 중심으로 부천시 전역에 걸쳐 살고 있다.

[관련유적]

부천시 계수동 산 3-15·산 3-1와 작동에 각각 청주한씨 묘역이 있다. 계수동에 있는 청주한씨 묘역에는 한홍윤 묘, 한홍주 묘, 한용 묘, 한오규 묘, 한여직 묘, 한진 묘, 한수경 묘, 한수 묘, 한덕흠 묘, 한준 신도비가 조성되어 있고, 작동에 있는 청주한씨 묘역에는 한탁 묘 등이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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