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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0769
한자 富川-
영어의미역 Bucheon Bow
이칭/별칭 경기궁,맥궁,각궁,복합궁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물품·도구/물품·도구
지역 경기도 부천시
집필자 여경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기
재질 대나무|참나무|뽕나무|산벚나무|물소뿔|민어부레|쇠가죽|소힘줄
용도 공격|수련|의례
관련의례 궁중연사|반궁대사례|향음주례

[정의]

경기도 부천시에서 약 150여 년 전부터 만든 활.

[개설]

전국 각지에서 출토된 타제 및 마제 석촉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우리나라는 선사시대부터 궁시(弓矢, 활과 화살)를 사용하였다. 부여·옥저·맥·마한·진한 등지에서 궁시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구려의 경우 220년(산상왕 26)부터 맥궁을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558년(진흥왕 19) 나마 신득이 포궁(砲弓)을 제작하여 성 위에 구축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활쏘기 경기는 일반적으로 음력 3월경 청명한 날을 택하여 궁사들이 편을 짜서 열렸다. 궁사들이 번갈아 활을 쏘면 기생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궁사들의 뒤에 나란히 줄을 지어 서서 소리를 하며 격려하였고, 화살이 과녁을 맞히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여흥을 돋우면서 주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와 활쏘기를 같이 하게 하여 사풍(射風)이 보급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 비류왕 17년(320) 궁궐 서편에 사대(射臺)를 설치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백성을 모아 왕이 지켜보는 가운데 활쏘기를 하였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후주서(後周書)』에 “백제의 습속에는 기사(騎射)를 중히 여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에서 활쏘기가 풍속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는 788년 봄에 독서출신과를 정하여 문무를 구별하기 전까지는 활쏘기로 인재를 뽑았다. 고려시대에도 무예를 중히 여겨 국왕이 때때로 친림하여 장군들의 활쏘기와 말타기를 사열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397년(태조 6)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에 사인소(舍人所)를 설치하여 병학·기사 등 6학 교도관을 두고 대소 관료와 한량들의 자제들을 각 과별로 학습시켰는데, 이때 활쏘기의 호를 관덕(觀德)이라 하였다. 태조 이래 역대의 왕들이 활쏘기를 즐겨 이를 장려하였기 때문에 문과 출신의 문신들도 활을 잘 쏘았으며 임금이 친견한 가운데 궁술대회를 자주 열었다.

고종 때에 이르러 사풍(射風)이 줄어들었다가, 1899년 서울의 사직동에 황학정(黃鶴亭)이 설립되면서 다시 왕성해졌다. 일제강점기 때에 활쏘기가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1922년 황학정이 중추가 되고 조선궁도연구회가 발족됨에 따라 활기를 되찾았다.

[연원 및 변천]

부천시 활의 역사는 김원제·김동천·김장환·김기원으로 이어지는 4대와 김박영, 김윤경 부자를 통하여 전개되어 왔다. 김원제는 부천 지역에서 가장 먼저 활을 만들기 시작한 인물로, 지금부터 약 150여 년 전에 활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집안 대대로 한 사람씩 반드시 제궁 기법을 전수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원제의 뒤를 이어 아들 김동천과 손자 김장환이 맥을 이어나갔는데, 김동천은 궁장이면서 궁술의 명수이기도 하였다.

김장환은 1909년 부평군 서면 신대리[현 인천광역시 북구 작전동]에서 태어나 할아버지의 활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활과 인연을 맺었다. 16세 때부터 활을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1932년 황해도에 이주하여 살다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가서 명천지구특공대에 입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0년 함경도로 돌아와 함경궁도대회에 출전하여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47년 5월 다시 부천으로 돌아와 활을 만들면서 대한궁도협회 사범 겸 이사로 활동하였고, 1960년에는 대한궁술연구원을 개설하여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64년 경기도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71년 중요무형문화제 제47호로 지정되었다.

김기원은 1934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김장환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광복 때까지 자랐다. 아버지가 일본군에 쫓겨 다닐 때 어머니를 도와 활의 재료를 다듬었고, 부천으로 돌아와서는 활 만드는 일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제작 과정에서 전통 전수기법을 고집하는 아버지와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단점을 보완한 ‘태평궁’을 만들어 아버지의 신임을 얻었다.

김기원은 한때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양궁을 제작하기도 하였지만 원로 궁수들의 간청에 2년여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명궁으로도 이름을 떨쳐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유명인사와 한국 및 미군 고위 장성들, 외교 사절 등에게 궁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88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김박영은 활의 고장인 경상북도 예천시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궁시장인 아버지의 활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35세에 김장환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는데, 현재 그가 만든 국궁은 전국 사용량의 40%에 달한다. 김박영은 1996년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2007년 4월 재건축된 성무정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김윤경은 김박영의 아들로, 활 제작을 전수받는 한편 부천활박물관에서 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험학습을 끌어가고 있다.

[형태]

활에는 정량궁, 예궁, 목궁, 철궁, 고궁, 각궁(맥궁) 따위가 있다. 정량궁은 육량궁 또는 큰 활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각궁보다 약 2배 정도 긴 약 167㎝(5자 5치)이다. 정량궁은 무과의 초시, 복시 등 시험에서 사용되었다. 예궁은 궁중에서 활쏘기를 할 때 쓰는 크기가 가장 큰 의례용 활로 182㎝(6척)이다.

목궁은 나무로 만든 활로 사병용 또는 여름에 사용하는 보조용 활이다. 철궁은 몸체를 놋쇠로 만든 활로 전쟁 때 사용하였다. 고궁은 기병용 활로 우리나라 활 중에서 가장 작은 활이다. 각궁은 맥궁이라고도 하며, 무장이 기본적으로 갖추는 대표적인 활이다.

국궁의 특징은 쏘는 사람의 기력에 따라 힘 조절이 가능하고, 사거리가 최대 국궁 145m, 양궁 90m, 일본의 대나무 활 30m보다 길며, 활에 실을 걸면 양궁은 모양이 변하지 않는데 비해 국궁은 둥글게 말린 형태가 된다.

각궁은 여덟 가지 재료로 만든다. 활의 가운데 부분은 대나무, 줌통(손잡이) 부분은 참나무, 양쪽 끝에는 뽕나무를 이어 붙인다. 활 안쪽에는 소 힘줄, 활 바깥에는 물 소뿔을 붙인다. 화피(벚나무 껍질)는 방수 기능을 하는 마감재이고, 시위가 닿는 부분에는 쇠가죽을 덧댄다. 이것들을 민어부레를 세 시간 넘게 끓여 만든 풀로 붙인다. 재료를 깎고 다듬고 말리는데 6개월이 걸리고, 본격적인 제작 기간은 추석이 지나 찬바람이 불면서 시작하여 4개월 남짓 걸려 약 3,500번의 손길을 거쳐야 비로소 궁이 만들어진다.

부천 활은 맥궁(貊弓)으로 고구려 활에서부터 기원한다. 재료나 제작 방법, 성능에서 큰 차이 없이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맥궁이라는 명칭은 별칭이며, 재료를 기준으로 하면 각궁(角弓)이 더욱 정확하다. 초기의 활은 산과 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 목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점차 활에 적합한 박달나무·산뽕나무·대나무 등 재질이 좋으면서 지역에서 얻기 쉬운 소재로 바뀌었고, 활의 탄력을 높이기 위하여 소 힘줄이나 삼베 끈 등으로 묶거나 뿔 조각 등을 붙였다. 고조선시대에 사용되었다는 단궁은 박달나무로 만들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탄력이 강한 산뽕나무와 산비마자(山毘摩子)로 바뀌었다.

각궁이 기록에 등장한 때는 삼국시대이다. 즉 수백 년 동안 목궁을 사용하면서 개량하기 위하여 오랜 기간 수많은 과정을 밟아 왔다는 말이다. 목궁을 깎고 다듬고 뿔과 소 힘줄로 보강을 하던 끝에 각궁이라는 좋은 활을 만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부천시에는 활과 관련하여 부천활박물관, 성무정, 부천국궁장 등의 시설이 있다. 부천활박물관경기도 부천시 춘의동 8번지[소사로 482] 종합운동장 옆에 있으며, 2004년 12월 14일 개관하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으로 지정된 고 김장환의 국궁 유품 240점을 비롯하여 400여 점의 활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시대별 각종 활과 화살, 화차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활과 활의 역사, 제작 과정 따위를 전시물을 통해 볼 수 있다.

성무정은 건립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대한제국 말부터 부천군 소사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활을 쏘았다고 전한다. 1967년부터 성무정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데, 성주산(聖柱山)의 ‘성(聖)’ 자와 무예(武藝)의 ‘무(武)’ 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1년여 동안 재건축을 하여 2007년 4월 말 준공하였다. 부천국궁장은 전통 활쏘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부천활박물관과 같은 건물에 있는데,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연중 국궁교실을 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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