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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이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1213
한자 閔以升
영어음역 Min Iseung
이칭/별칭 언휘(彦暉),성재(誠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부천시
성별
생년 1649년연표보기
몰년 1698년연표보기
본관 여흥
대표관직 효릉 참봉

[정의]

조선 중기 부천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휘(彦暉), 호는 성재(誠齋). 진사를 지낸 민만(閔晩)이천서씨(利川徐氏) 사이의 다섯째 아들이다.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에 민윤창(閔允昌)·민경창(閔景昌)·민회창(閔會昌) 등 3남 1녀를 두었다.

[활동사항]

민이승은 어려서부터 서책을 가까이하고 문장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커서는 당대의 석학들과 학문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1682년(숙종 8) 대신들의 천거로 창릉과 영릉, 효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뒤에 효릉참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하였다. 그 후 좌랑(佐郞)·위수(衛率)에 임명되었다.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을 편집·기록하고, 종실의 잘못을 조사하고 규탄하는 임무를 맡아 보던 관청인 종부시의 종6품 주부로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 연구로 여생을 보냈다.

[학문과 사상]

민이승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일찍이 책을 많이 읽어 관직에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고 『주역(周易)』과 『상서(尙書)』를 주로 읽는 한편, 『사기(史記)』와 『한서(漢書)』 등을 읽고 문장에 온 힘을 다하였다. 또한 육경(六經)과 오서(五書)를 읽으면서 침식을 잊을 만큼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 후 윤명좌(尹明左)·심연희(沈延熙) 등과 함께 명제(明齋) 윤증(尹拯)의 문하에 들어갔다. 윤증민이승을 칭하여 말하기를, “성재는 마음과 노력을 다하여 모든 일에 힘쓰니 다른 사람이 민이승과 같다면 이루지 못한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 민이승은 당대 석학이던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도 학문을 논하였다.

민이승은 또한 매우 뛰어난 재질과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경전에 주를 달고 해석을 붙였다. 또한 유가·도가 등 제가(諸家)와 역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으며, 예학에 조예가 깊어 모든 경서에 붙여진 주석의 내용을 살펴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고 바로잡는 일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민이승은 십수 편의 작품집을 저술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문집인 『성재집(誠齋集)』 7권만 전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의왕시 미륵당 부근에 있었으나 김포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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