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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1217
한자 朴奎文
영어음역 Bak Gyumun
이칭/별칭 문서(文瑞),궁와(窮窩)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만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부천시
성별
생년 1670년 2월 26일[음]연표보기
몰년 1741년 9월 8일연표보기
본관 밀양
대표관직 사간원헌납

[정의]

조선 후기 부천 지역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문서(文瑞), 호는 궁와(窮窩). 밀양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으로, 아버지는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지내고 계양팔문장가(桂陽八文章家)에 속하는 박선(朴渲)이다.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이며, 3남 1녀 중 장남이다.

[활동사항]

박규문은 어릴 때부터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일찍이 학문을 이루었고, 1699년(숙종 22)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24년 만인 1720년(숙종 46)에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동구릉에 있는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능인 혜릉(惠陵)을 지키는 종9품 참봉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세제(世弟)[영조] 책봉을 둘러싸고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 세제의 책봉을 지지한 노론이 쫓겨나고 소론이 등장하면서 2년 만에 관직이 박탈되었다. 이때 종형인 박기문(朴起文)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다음 해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에 7등으로 합격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고,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도 겸했다. 빠른 승진으로 왕세자에게 경전과 역사서를 강독하던 정6품 세자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었다.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가 외직인 황해도 장연현의 현감이 되었다.

그 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725년(영조 1) 7월 15일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 15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종3품 통훈대부로서 사간원의 헌납을 겸하여 춘추관의 기사관이 되어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727년(영조 3) 정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을 때 “관리의 임명을 신중히 하고, 대신을 공경하며, 직간을 용납하고, 훈련도감의 둔전을 수축하며, 탐관오리의 죄를 논하여 파직해야 한다. 또 조운의 곡식과 수리시설의 이용 폐단, 서해에서 곡물과 겉곡식을 대신 받는 폐단, 장산곶이 무너지고 물에 빠졌던 환난, 궁가에 속한 둔전의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 5월 29일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는데, 7월에 상소를 올린 것이 원인이 되어 관직이 박탈되었다. 1730년(영조 6) 5월 1일 장령으로 복직되었으며, 1732년(영조 8) 9월 16일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박규문은 사간원헌납으로 있을 당시 상소를 올려 조정이 세상의 어지러움을 다스려 맑게 되기를 원하였고, 세도가인 풍양조씨의 횡포를 배척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파직되었다.

박규문은 유서에서 “10년의 폐쇄적이고 고립된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깨끗이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구나.” 하면서 후손들에게는 관직에 나가지 말도록 경고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롭고 가난하게 생활하여 임종할 때에도 자제들에게 “가력(家力)을 계산하지 말고 씀씀이를 헤프게 하지 말라. 또한 장사지낼 때 쓰는 명정도 계양의 궁색한 움집에 살았던 박공(朴公)이라고 쓰라.”고 할 정도로 근검절약의 정신을 강조하고 이를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서산 부모 묘 아래에 조그마한 자리가 있으면 그곳에 나를 묻어라. 그리하여 후손들이 나에게 성묘 오면 나의 부모 묘도 살피게 되어, 오래도록 성묘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규문은 이어서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당부하며,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자제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강조하였다. 이것을 글로 써서 남긴 것은 “후일 이 정신을 다만 구호로만 삼지 말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원해서이다.”라고 하였다.

[저술 및 작품]

1733년(영조 9) 10월에 정리한 『궁와집(窮窩集)』에 1721년 혜릉 참봉으로 있을 때의 행상을 적은 「혜재추야우원택경소작(惠齋秋夜遇元宅卿小酌)」을 비롯하여 「영설(詠雪)」·「망월루(忙月樓)」·「기몽(記夢)」·「만신승지(挽申承旨)」 등 신변잡기와 주위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정이 담긴 296편의 글이 전한다. 이장(李莊)·남휘(南揮)와 함께 계양삼호걸로 불린다.

[묘소]

묘지는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속사곳리에 있는데, 비문은 승정원동부승지 권영(權瑩)이 지었다. 권영박규문과 성장 과정이 매우 흡사하였을 뿐 아니라, 서로가 경외하며 사귄 막역한 사이였다. 비문에서 “규문의 높은 자질과 정직한 처세, 그리고 효행과 우애로 인해 가히 일세의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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