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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1337
한자 金千鎰
영어음역 Gim Cheonil
이칭/별칭 사중(士重),건재(健齋),문열(文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남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의병장
출신지 전라남도 나주시
성별
생년 1537년연표보기
몰년 1593년연표보기
본관 언양
대표관직 수원부사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가계]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할아버지는 주부(主簿) 김윤손(金潤孫)이며, 아버지는 진사(進士) 김언침(金彦琛)이다.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이감(李瑊)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천일은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었고, 이어서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 양산숙(梁山璹), 박환(朴懽)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북으로 출병, 경기도 부천시 인근인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여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 일시에 적군 15명을 죽이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전라병사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江華島)로 진을 옮겼다. 9월에는 통천(通川)과 양천(陽川) 지역의 의병까지 지휘하게 되고 매일같이 강화도 연안의 적을 공격하였으며 양천, 김포 등지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1593년 2월에는 강화도를 나와 권율(權慄)의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1593년 6월 14일 3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하하여 진주성에 입성하여 관군과 의병의 주장(主將)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었다. 10만 명에 가까운 왜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함락시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촉석루(矗石樓)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이항(李恒)의 문인이었으며 김인후(金麟厚), 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송천집(宋川集)』과 『건재집(健齋集)』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

1603년(선조 36)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이 가증(加贈)되었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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