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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2005
한자 古康洞出土靑銅器時代聚落遺蹟
영어의미역 Prehistoric Site in Gogangdong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경기도 부천시 작동
시대 선사/청동기
집필자 이희인

[개설]

고강동 선사유적은 한강 유역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취락 유적으로 총 21기에 달하는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주거지 내에서 출토된 석부·석촉·반월형 석도 등의 생활 도구를 통해 청동기시대 고강동 지역에 거주한 사람들이 농경·수렵·채집으로 생계를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의 공렬토기와 늦은 시기의 점토대토기가 같이 출토되고 있어 청동기시대 전반에 걸친 문화의 변화상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한다.

유적의 연대는 출토 유물을 통해 상한과 하한을 추정할 수 있다. 상한은 청동기시대 전기의 토기인 공렬토기가 주종을 이루는 것으로 보아 기원 전 10~8세기경으로 추정되며, 하한은 점토대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후기로 설정된다. 이 밖에 고강동 선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석곽묘, 조선시대의 건물지 등이 조사되었다. 이를 통해 고강동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사적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홍수로 인해 발견된 거대한 선사 주거지]

고강동 선사유적고강동작동에 있는 해발 91.6m의 청룡산 정상부와 주변 능선에 위치한다. 이곳은 부천시의 북동부 끝자락에 해당하며, 행정구역상으로 고강본동·고강동·작동 등 3개 동에 걸쳐 있다. 유적이 위치한 청룡산은 낮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으로 현재는 주택가에 둘러싸여 섬처럼 되어 있으며, 경인고속도로가 구릉의 중앙부를 동서로 관통하면서 구릉이 남북 방향으로 양분되어 있다.

고강동 선사유적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95년 여름 홍수로 반월형 석도(石刀)와 석창(石槍) 등이 드러난 데서 비롯되었다. 몇 차례의 지표 조사를 통해 유구 일부가 드러난 것이 확인되었으며,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 한양대학교박물관과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등이 7차례에 걸쳐 실시하였다.

1~4차 조사는 한양대학교박물관과 문화인류학과가, 5~7차 조사는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하였다. 유적은 경인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북쪽은 A지구, 남쪽은 B·C지구로 구분되는데, A지구에는 해발 68.9m의 주능선을 따라 완형 또는 일부 파괴된 주거지 11기가 위치하고, B지구에는 해발 91.9m의 구릉 정상부를 중심으로 주거지 10기, 적석환구유구(積石環溝遺構),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석곽묘, 조선시대 건물지가 있다.

[한강 유역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주거지]

고강동 선사유적 중 주거지는 대부분 구릉 정상부 평탄지나 완만한 경사면에 입지한다. 사면의 경사면을 ‘ㄴ’자로 굴토해 조성한 것으로, 장축 방향은 능선에 평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부는 등고선 방향과 직각을 이루기도 한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말각장방형·장방형이 확인되며, 장방형이 대부분이다.

규모는 대체로 20~30㎡의 범위에 있으나, 7호·10호·13호와 같은 세장방형 주거지의 경우는 60㎡가 넘는다. 이 가운데 5차 조사에서 확인된 13호 주거지는 장축 길이 18.9m, 너비 3.5m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13호 주거지는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확인된 주거지 가운데 가장 대형으로 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세장방형 주거지 중에서도 초대형급에 속한다.

1호·2호·13호 주거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거지 내부에서는 기둥 구멍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고강동 선사유적 주거지의 특징적인 요소로 파악되고 있다. 주거지의 바닥면은 일부 점토를 다진 흔적이 확인되나, 대부분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화덕자리가 발견된 경우는 많지 않은데, 8호·10호·18호 주거지에서 확인되었다. 발견된 화덕자리는 바닥을 그대로 사용한 무시설식이거나 땅을 약간 굴토하여 만든 수혈식이다.

[청동기시대의 제사 유적-적석환구유구]

고강동 선사유적 중 적석환구유구는 B지구의 청룡산 최정상부인 해발 91.6m 지점에 위치한다. 가운데에는 적석시설(積石施設)이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며 도랑[溝]이 돌아간다. 적석시설은 말각방형의 평면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600㎝ 가량이며, 적석의 가운데 부분이 다소 불룩한 형태를 띤다.

도랑은 적석시설과 10m 내외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원형으로 돌아간다. 도랑의 지름은 도랑 바깥선을 기준으로 약 30m이며 전체 길이는 63m이다. 도랑의 서쪽 일부는 끊어져 있는데, 이는 출입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도랑의 폭은 3~4m 가량이나 경사가 급한 남동쪽은 1m 내외이며, 깊이는 약 80~100㎝ 정도이다.

적석환구유구는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독립적으로 위치하는 입지적 특성, 제기형 토기가 출토된 점, 바닥면에 불탄흙[燒土]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점을 고려해볼 때 제사 유적으로 파악된다. 이 적석환구유구는 2000년 조사 당시에는 그 예를 찾기 어려웠던 제사 유구로서 청동기시대의 의례는 물론 종교와 사회조직 등 비물질적인 분야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청동기시대 문화상을 보여주는 토기들]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발굴된 토기류는 공렬토기(孔列土器)·구순각목공렬토기(口脣刻目孔列土器)·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점토대토기와 흑도편도 소량 출토되었다.

1) 공렬토기

공렬토기는 입술 바로 아래에 작은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나 있는 토기로 청동기시대 전기에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공렬토기는 평안남도와 황해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서 출토되며, 동북 지역에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가운데 공렬토기와 구순각목공렬토기는 11개 주거지에서 출토되어 출토된 토기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 유적에서 공렬토기는 대부분 구순각목과 결합되어 나타나며, 순수한 공렬토기의 비율은 높지 않다.

공렬토기는 대부분 직립 구연으로 토기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구멍을 냈다. 구멍은 지름이 0.1~0.3㎝이며, 토기 구연에서 밑으로 0.5~1.0㎝ 정도의 위치에 3㎝ 내외의 간격으로 나 있다. 구순각목과 결합된 경우, 각목은 간격이 0.5~1.5㎝로 일정하지 않다. 출토된 공렬토기의 형태는 호형(壺形)과 발형(鉢形)이 대부분이다.

2) 제기형 토기

제기형 토기는 완(盌)이나 발(鉢) 밑에 높은 굽이 달린 형태로 두형(豆形) 토기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두형 토기는 깊이가 얕은 완이나 발 아래에 원통형이나 나팔상의 높은 대각(臺脚)이 부착된 것으로, 형태가 한자 ‘두(豆)’의 모습을 띠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토기는 고강동 선사유적의 제사 유구인 적석환구유구의 환구에서 출토되어 제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에 따라 제기형 토기로 명명되었다.

제기형 토기는 환구유구의 중간층에서 3점이 출토되었다. 2점은 대각만 남아 있는 상태다. 토기의 크기를 배신(杯身)이 남아 있는 토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높이 10.5㎝, 배부 구경 13㎝, 기벽 두께 0.9㎝이다. 대각은 안이 비어 있는 원통형으로 상부로 올라가면서 폭이 좁아지며, 이 대각의 상단에서 배부(杯部)가 거의 90°로 접합되어 외반하면서 올라간다. 색조는 갈색을 띠며, 태토에는 다량의 사립과 운모가 혼입되어 있다. 이 제기형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토기 문화는 물론, 적석환구유구와 함께 제의 행위와 관련된 당시의 정신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3) 점토대토기

점토대토기는 아가리에 원형 및 삼각형의 점토띠를 말아 붙인 토기로 청동기시대 후기에 남한 지방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이 토기의 상한 연대는 BC 5~4세기경으로 추정되며, 하한은 기원 전후로 파악된다. 점토띠의 단면 형태에 따라 원형 점토대토기와 삼각형 점토대토기로 구분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원형 점토대토기에서 삼각형 점토대토기로 변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점토대토기는 모두 원형 점토대토기이다. 모두 파편이어서 정확한 기형을 추정하기가 어렵다. 동체부는 하단에서 상부로 수직에 가깝게 급경사를 이루며 안쪽으로 올라가며, 그 끝에 원형의 점토대가 접합되어 있다.

원형 점토대토기는 7호·16호·18호·20호 주거지와 적석환구유구의 환구에서 구연부와 저부편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주거지 상부 퇴적토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유구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18호 주거지에서는 북서벽과 노지(爐址) 내부에서 점토대토기편이 출토됨에 따라 이 주거지는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점토대토기단계의 유구라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생계를 도왔던 생활 도구-석기]

고강동 선사유적에서는 석검(石劍)·반월형 석도·석부(石斧)·석촉(石鏃)·석착(石鑿)·석창 등 다양하고 정교하게 가공된 마제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1) 마제 석검(磨製石劍)

마제 석검은 청동기시대에 실생활 및 의기용으로 돌을 갈아 제작된 석기다. 검신(劍身)과 자루로 조합되며, 검신은 봉부(鋒部)에서 양날 부분으로 가면서 급격하게 넓어지다가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검신의 단면은 마름모꼴 또는 볼록렌즈 모양을 이루고 있다. 크기는 길이 30㎝ 내외가 많으나, 15㎝ 내외의 짧은 형태도 있다. 마제 석검은 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대개 슴베[莖]가 달린 유경식(有莖式)과 손잡이가 달린 유병식(有柄式), 슴베나 손잡이가 없는 무경무병식(無莖無柄式)으로 나뉜다.

고강동 선사유적의 마제 석검은 1호·6호·7호·8호·17호 주거지에서 출토되었다. 7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검은 일단유경식(一段有莖式)이며, 8호와 17호 주거지 출토 석검은 일단병식(一段柄式)이다. 이 가운데 8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검은 장기간 사용함에 따라 검신을 여러 차례 재가공한 것으로 보이며, 봉부와 손잡이 부분에 사용흔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실생활용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반월형 석도(半月形石刀)

반월형 석도는 청동기시대에 곡식 수확용으로 쓰인 석기다. 형태는 장방형·배 모양[舟形]·물고기 모양[魚形]·삼각형 등으로 다양하다. 장방형은 주로 한반도 동북 지방에서 보이며, 배 모양은 서북 지방에서 많이 출토된다. 삼각형은 청동기시대 중기와 후기에 나타나며 서남부 지방에서 주로 확인된다.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반월형 석도는 석기류 중 가장 출토 빈도가 높게 나타났는데, 총 21개 주거지 가운데 10여 개 주거지에서 출토되었다.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춘 반월형 석도는 배 모양으로 크기가 길이 10~13㎝, 너비 4.5~6㎝, 두께 1㎝ 내외이다. 석도 중앙에는 지름 0.4㎝ 내외의 구멍 2개가 뚫려 있다. 날 부분은 외날이며, 전면적으로 마연된 경우도 있으나 날 부분만 마연된 것도 있다.

3) 마제 석부(磨製石斧)

마제 석부는 돌의 전면 또는 일부를 갈아 만든 도끼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어 사용된 대표적인 석기다. 석부는 날의 형태에 따라 양날 도끼[兩刃石斧]와 외날 도끼[單刃石斧]로 구분된다. 외날 도끼는 자귀나 대팻날 등이 해당되며, 양날 도끼는 날의 평면 형태에 따라 조개날 돌도끼[蛤刃石斧]와 곧은 날 돌도끼[扁平扁刃石斧] 등으로 구분된다. 양날 도끼는 벌채(伐採)나 굴토용(掘土用)으로 사용되며, 외날 도끼는 목재 다듬기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밖에 환상석부(環狀石斧)와 다두석부(多頭石斧: 톱니날 도끼) 등 일반적인 석부와는 다른 형태의 특수 도끼도 있다.

고강동 선사유적의 마제 석부는 10호·11호·15호 주거지에서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10호와 11호 주거지에서는 각각 조개날 돌도끼와 외날 도끼가 출토되었으며, 11호 주거지에서는 다두석부편이 출토되었다. 15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부는 길이 11.9㎝, 폭 6.4㎝, 두께 1.7㎝의 외날 도끼로 전면에 마연을 하였으며, 날 부분에 더욱 세밀하게 마연한 흔적이 관찰된다.

4) 마제 석촉(磨製石鏃)

석촉은 화살이나 작살의 끝에 붙여 사냥 도구나 무기로 사용한 석기다. 마제 석촉은 화살대와 결합하는 슴베의 유무와 형태에 따라 크게 무경식(無莖式)·유경식(有莖式)·유엽식(柳葉式)으로 구분된다. 무경식은 몸통의 석촉 하부 중앙에 홈을 파서 만든 쌍각촉, 하부를 만입시킨 삼각만입촉(三角灣入鏃), 하부가 직선으로 끊어진 삼각촉(三角鏃) 등으로 나뉜다. 유경식은 일단경식(一段莖式)과 이단경식(二段莖式)으로 구분된다. 유엽식은 몸통과 슴베가 뚜렷한 구별이 없는 형식이다.

고강동 선사유적의 마제 석촉은 7호·9호·16호·20호 주거지에서 이단경식과 삼각만입식이 출토되었다. 7호 주거지에서는 이단경식과 삼각만입식으로 추정되는 석촉 2점이 출토되었다. 삼각만입식 석촉은 몸통 중앙부에 양방향으로 투공된 구멍이 남아 있는데, 이는 여주 흔암리 유적에서 출토된 삼각만입식 석촉과 유사한 형태로 파악된다. 20호 주거지에서는 이단경식과 삼각만입식 석촉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이단경식 석촉은 촉 부분을 추가로 가공한 흔적이 관찰된다.

5) 기타

고강동 선사유적에서 출토된 석창·환상석부·석착 등은 출토 빈도가 높지 않고 보존 상태도 좋지 않다. 석창은 청동기시대의 사냥 도구 및 전투용 무기로 8호 주거지에서 출토되었다. 환상석부는 절단용(切斷用)이나 전투용(戰鬪用) 또는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휘용(指揮用)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1호·5호 주거지와 적석환구유구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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