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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02040
한자 李希雍
영어음역 Yi Huiong
이칭/별칭 중우(仲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부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남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미상
성별
생년 미상
몰년 1541년(중종 36)연표보기
본관 전의
대표관직 사간|강원도 관찰사|황해도 관찰사

[정의]

조선 중기 부평부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중우(仲友). 아버지는 이수영(李壽嬰)이고, 어머니는 이영홍(李永弘)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함장(李諴長), 증조할아버지는 이사관(李士寬)이다.

[활동사항]

이희옹은 1495년(연산군 1) 사마시 진사과를 거쳐, 1504년(연산군 10) 별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 중 중종반정(中宗反正)을 도운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1509년(중종 4)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16년(중종 11) 남원부사로 파견되었고, 1518년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재직 중 반정(反正) 때의 녹공(錄功)을 공훈 기록에서 없애야 한다는 탄핵을 받았다. 1520년(중종 15) 9월 부평부사로 부임하였고, 1525년(중종 20) 임기를 채우고 교체되었다. 같은 해 사간으로 재직하다 언관(言官)에 합당치 못하다는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1530년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재임하면서 피폐한 고을을 정상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1537년 찰리사(察理使)에 이어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그 후 강원도 관찰사,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41년(중종 36)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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