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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A010101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지

“마을이 성주산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다 보니까 험준한 산과 고개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편이에요.”

고향하면 떠오르는 풍경의 한가운데에 마을 숲이 있다. 마을 들머리나 앞들, 갯가, 뒷동산의 솔밭이나 느티나무 고목 아래에서는 마을 제례와 축제가 벌어지곤 했다. 부천 심곡본동에는 이런 원초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고향 경관이자 오랫동안 사람과 자연이 교감하는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역사, 문화, 신앙 등을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되고 유지돼 온 마을의 상징이다. 토착신앙에 뿌리를 둔 숲은 흔히 당숲, 당산숲, 성황림, 산림 등의 명칭을 달고 있는데 당산목이나 성황목 등 숭배의 대상이 되는 큰 나무를 포함하는 숲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며 해마다 졔례나 의식이 벌어지는 공간이 된다.

부천 소사구 심곡동 일명 깊은구지에도 마을 도당굿을 지내는 세 그루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가 있는 곳은 심곡동 605번지[15통 2반]로, 이 길목은 옛날 마니골[인천광역시 북구 장수동]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그 일대가 골이 깊고 나무들이 울창하여 깊은 계곡, 즉 심곡(深谷)이라고 불렸다.

세 그루의 나무 중에 할아버지 나무는 잦은 화재와 벼락으로 인해 몰골만이 남아있고 할머니 나무는 정명고등학교 초입에 서 있었으나 도시계획으로 잘려졌다. 지킴이 나무라고 불리는 손자나무는 정명고등학교 초입 시장 옆에 있는데 동사무소에서 철책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매년 시월쯤에 이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마을 번영축제를 지낸다.

특히 심곡본동 깊은구지 도당제는 지역 주민 및 지역의 무병장수와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본토 주민들이 주도가 되어서 제례적 행사로 유지해 오다가 지난 2003년도부터 주민들의 폭 넓은 관심과 참여 속에 축제로 승화된 기원제, 즉 마을번영축제가 열리고 있다.

마을번영축제는 도당굿이 변형된 형태로, 추수가 끝나는 10월 초 당제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도당굿을 행하던 당집은 소림사의 근방인 626번지에 있었으나 언제 헐린 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마을 사람들은 도당굿을 행하기 전에 까만 죽나무와 참나무로 장승을 만들어 마을의 동쪽과 남쪽에 세워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부천에서 향토구술사로 활동하는 이성욱 씨는 깊은구지를 소개하는데 마을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산과 고개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한다.

“마을이 성주산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다 보니까 험준한 산과 고개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은 편이에요. 마을의 가장 동쪽에 있는 소사동에서 시흥시 대야동을 잇는 고개가 여우고개고 그 다음 고개가 하우고개예요. 그리고 인천에 접해 있는 고개를 마니고개라고 하는데 하나같이 다니기 험난한 길목이었어요.”(이성욱, 부천문화원 향토구술사가)

깊은구지의 중심에 있는 성주산의 줄기를 따라 남북으로 잇는 고갯길이 여우고개, 하우고개, 마니고개 등 모두 세 군데가 있는데 이 고개들은 하나같이 부천에서 시흥시와 인천시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성주산은 부천시 남단에 동서로 길게 뻗은 부천의 주산으로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를 자처하였다. 오래 전부터 성주산은 마치 소가 앞다리를 굽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와우산(臥牛山)이라고도 불렸다. 도시화가 되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벌막 쪽에서 성주산의 소가 웅크린 형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성욱 씨의 말에 따르면 하우고개깊은구지, 장말, 약대, 오정 등지의 사람들이 시흥, 안산으로 오가던 아주 큰 고개였다고 한다. 특히 이 고개는 조선 말기에 도둑들이 들끓어 시흥 뱀내장을 보러가거나 소사 우시장, 부평 황어장을 보러 다니던 장꾼들이 뒤를 살피며 급하게 걷다보니 턱에 숨이 차서 하우하우 숨을 내뱉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또한 인근에 소나무가 많아 학이나 두루미, 백로 등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학고개로 불리다가 하우고개로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 하우고개는 아주 빈번하게 사람들이 왕래를 했던 고개임은 틀림없다. 경인철도가 부설되고 경인국도가 생기면서 깊은구지가 읍으로 발전하고 경기 시흥 사람들의 왕래가 더욱 잦아지자, 하우고개를 포장해서, 구불구불 시흥으로 넘어가거나 시흥에서 넘어오는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마리고개는 깊은구지에서 인천으로 넘어갈 때 이용하던 고개이다. 조선시대 굴포천이 뚫리기 전에는 부평이나 인천으로 가려면 오정의 누른말이나 내촌 압구지에서 나룻배를 타거나 깊은구지의 마리고개를 넘어야 했다. 마리고개는 두 개였는데 그 중의 하나는 정명고등학교 옆에 난 고개이다. 다른 하나는 부천남부경찰서 지역의 검디를 거쳐 부천남중학교를 지나 도티골 위쪽으로 난 고개길을 작은마리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작은마리고개 양편으로 초등학교, 중학교들이 들어서 학교촌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마니(마리)고개는 깊은구지 마을번영축제와 깊은 관련이 있어요. 좀 경악할 사건이 얽혀 있지만요. 옛날 마을사람들이 성주산을 가기만 하면 죽어서 나오는데 사람의 시신은 없고 목만 댕강 잘려서 발견됐다고 해요. 그래 당시 머리를 뜻하는 마니가 고개 이름이 되었는데, 마을사람들은 성주산 호랑이가 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놈을 어떻게 달랠까 하다가 생고기로 제사를 올리기 시작한 거죠. 그러니 마을번영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죠.”(이성욱, 부천문화원 향토구술사가)

마리고개의 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러한 이야기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대군이 노수라는 강에서 무서운 폭풍우를 만나자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소와 양의 고시를 다져 넣어서 사람의 머리처럼 빚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는 만두의 유래를 연상시킨다. 뛰어난 기지와 재치로 귀신을 속인 제갈량처럼 성주산 호랑이의 심기를 달랜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효험을 본 것일까? 성주산의 맥을 이은 마을답게 용맹한 호랑이의 기상으로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지막 고개인 여우고개는 소새에서 시흥으로 넘어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시흥에서 소새 우시장으로 소를 끌고 넘어 다녔으며, 부평 황어장을 가기 위해 넘어다니는 고개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여우가 많이 출현해서 여우고개라는 땅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보통 여시고개라고도 부르는데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여우를 부를 때 쓰던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우고개의 동편으로 할미산, 서편으로는 성주산이 자리를 잡고 있고 고개 아래에는 웃소새, 아래소새가 자리를 잡고 있으므로 여우고개의 어원은 야트막한 고개라는 의미가 더 가깝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이성욱(부천문화원 향토구술사가)
[참고문헌]
  • 부천문화원:부천의 문화와 역사-지명유래(http://bucheon.kc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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