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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A030201
지역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정지

“인천 연안부두에서 생선을 떼다가 새벽 두 시에 자전거를 타고 영등포 시장에 가서 팔았어요.”

부천 자유시장에서 약 17년 동안 이장을 역임했다는 이춘중 할아버지(76세).

6·25 전쟁 이후부터 시장과 인연을 맺어 온 할아버지는 초기시장부터 현재 자유시장에 이르기까지 시장의 형성 과정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토박이 상인이다.

“6·25 때 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그 때가 부천군 소사읍 심곡리였어요. 그런데 여기는 시장이라고 볼 것도 없고 머라고 그럴까, 얼른 얘기하면 어려웠을 시절 아닙니까. 내가 1965년부터 장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가게 앞 6m길[부천자유시장상인회 앞]이 김포로 나가는 길이었어요. 김포에 들어가는 버스가 여기밖에 없었는데 (경인)철도국 직원이 그 근처에서 근무하면서 버스가 지나가면 깃발을 내렸다 올렸다 그랬어요.(이춘증, 부천 자유시장 상인, 76세)

하지만 열악한 시장 환경과는 달리 부천역 앞은 매일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역 앞에 하꼬방(판자촌)들이 늘어서서 노점을 이루었는데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부천의 가장 중심지였다.

이춘증 할아버지가 자유시장에서 처음 시작한 장사 품목은 생선이었다. 땡땡이 골목[기차가 지날 때마다 땡땡땡 소리가 울렸다고 해서]으로 들어가는 입구 기름가게 자리에서 일 년 간 장사를 했는데 그 때 나이가 30대 초반이셨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벌어 놓은 것이 많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서울 창신동에 사는 사람이 주인으로 있었던 가게를 보증금 이만 원에 월세 사천 원을 주고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 년간은 빠짐없이 자전거를 타고 서울 영등포 시장과 연안부두를 오갔다.

“그 때만 해도 차가 어디 있어요.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자전거로 연안부두에서 생선을 떼다가 영등포 시장에 가서 팔았어요. 그러다가 따로 구멍가게를 얻어서 나왔죠. 왜냐면 내 6촌동서가 당시 이장이었는데 창신동 주인집을 관리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내가 처음 왔을 때 땅 한 평에 이삼천 원 밖에 안했거든. 근데 일 년을 딱 살고 났는데 십만 원을 내 놓으라고 하는 거야. 그래,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집주인을 찾아가서 따졌어요. 그리고 내려왔는데도 화가 안 풀리거든. 그래, 지금 사는 집이 원래 하꼬방(판자촌) 자리였는데, 거금 십칠만 원을 주고 집을 사서 나왔다니까.”(이춘증, 부천 자유시장 상인, 76세)

시장 안에서 아옹다옹 다툼도 많았던 그 때, 없는 형편에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지만 이춘증 할아버지는 오로지 사남매를 잘 키우기 위해서 생선장사, 과일장사, 구멍가게 장사를 맨 손으로 일궈냈다. 비록 자식들 대학 공부는 못 가르쳤어도 고등학교까지 모두 마쳐주고 시집장가까지 보낸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내리사랑이라고, 어여쁘게 장성한 손자손녀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 표정에는 내내 보람과 뿌듯함이 묻어났다.

“내가 올해 일흔 여섯인데 내 나이 된 사람들 중에서 아직까지 장사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나도 이제 슬슬, 오후 되면 잠깐 하는 거지. 가끔 여기서 동장하던 사람들, 통장하던 사람들하고 술 한 잔씩 나누고 그래요.”(이춘증, 부천 자유시장 상인, 76세)

새벽 두 시에 일어나 고단한 잠을 떨치고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을 이춘증 할아버지는 고희가 넘은 세월을 맞이하고 나서야 너털웃음을 지으실 수 있었다. 전쟁 직후에 생긴 수많은 하꼬방(판자촌)들과 노점상인들, 그리고 그들이 힘겨운 삶 속에서 꺼내든 희망의 씨앗들이 지금의 자유시장을 만들어 냈다.

[정보제공]

  • •  이춘증(부천 자유시장 상인,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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