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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6C030201
지역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원

"휴전되기 전에 결혼을 하게 됐어요. 내가 여기 올 때 군대에서 휴가증을 떼어 줬거든요.”

초록마을 춘의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새마을 운동이 일어난 직후부터였다. 그러나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하에서부터 근대화의 조짐이 있었다. 예로부터 춘의동 주민들은 농사짓는 일을 생업으로 여기며 살았는데 일제시기에 이곳에 민간공항이 들어서면서 공항으로 가는 길을 내기 위해 도로를 확장했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벌써 일본인들이 이용하는 민간항공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마을이장이었기 때문에 나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해서 공항 활주로도 닦고 그랬죠.”(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해방 후, 일제가 춘의동에 남기고 간 것 가운데는 공항뿐만 아니라 채 짓지 못한 고사포 진지도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잠시뿐이었다. 한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이 터지면서 한기원 할아버지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먼 전쟁터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송림학교에 집합하라는 명령이 떨어져 그곳에서 하룻밤만 자고 바로 대구로 내려가게 된 할아버지는 이주일 훈련에 총 쏘기 장전하는 것만 겨우 배워서 전방에 나갔다. 이에 할아버지 집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고 얼마 후 전쟁터에 나가있는 할아버지에게 약혼을 하라는 편지가 날아들었다.

“전방에 나가 있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 집에서 편지가 왔더라고. 장가들라고 왔단 말이야, 그때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를 판인데 연락이 왔더라고, 아 그래 그런가보다 그땐 지금처럼 약혼이고 뭐고 없어요. 얼굴 보는 데가 어디 있어. 그냥 왔지. 그래서 휴전되기 전에 결혼을 하게 됐어요. 내가 여기 올 때 군대에서 휴가증을 떼어 줬거든요.” (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이렇게 해서 전쟁 중에 일주일 휴가를 얻어 집으로 귀휴한 할아버지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들기도 전에 곧바로 전쟁터로 뛰어들어 휴전이 될 때까지 군복무를 계속해야만 했다.

“나는 군대에서 박격포를 쐈는데 대대장이 내 포 쏘는 모습을 보더니 놓지를 않는 거야. 그래 휴전되고 나서도 얼마 있다가 한 일 년 반 정도 있다가 겨우 놔줬어. 근데 그 사람이 죽었어. 6·25 휴전될 무렵 전쟁이 치열했거든. 난 겨우 살아 나와서 연천 위에 대광리에서 제대했어요.”(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결혼할 적 당시 찍은 사진을 고이 간직했다는 할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이끄시고 장롱 깊이 둔 사진첩을 천천히 꺼내셨다. 전쟁의 상흔이 옅게 남아있던 1952년, 한적한 겉저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풋풋한 선남선녀의 결혼식 풍경이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졌다.

“내가 스물세 살에 찍은 거니까 1952년도인가 될 거에요. 그러니까 전쟁 분위기가 만연할 때 장가를 든 거에요. 여기 같이 전쟁터에 나간 사촌도 있네요. 여기 있는 사람은 지금 저 가고 없지.”(한기원, 당아래 주민, 1932년생)

옛 사람들을 회상하면서 회한에 젖은 한기원 할아버지. 전쟁의 상처는 씻을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았다. 일제시기와 광복, 6·25 전쟁을 거치는 동안 춘의동의 많은 청년들이 외지에서 목숨을 잃거나 오랫동안 타향살이를 해야만 했다. 수 년 간 젊은 청년들이 안팎에서 지켜낸 춘의동은 그 위에서 무럭무럭 초록빛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정보제공]

  • •  한기원(당아래 주민, 193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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